[고양이를 부탁해]를 본 후로 며칠이 지났다. 리뷰는 내가 쓰겠다고 떡하니 큰소리까지 쳐 놨는데 도무지 뭔가를 쓸 수가 없다. 할말이 넘쳐서 일까? 아니면 쓰디쓴 입맛에 할말이 나오지 않는 걸까? 답답하다. 아니 더 답답한 일은 내가 벌써 스물 두 살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아직도 스무 살의 언저리에서 방황을 업으로 살아가고 있는데 이제 그 시절은 저만치 멀어져 가고 있다.
촉망받는 32살의 여류 감독인 정재은은 스무 살 여자의 이야기를 추사 김정희의 달필이 그러하듯이 참으로 유려하게 그려낸다. 너무 가볍지도 너무 무겁지도 않게 스무 살의 웃음과 아픔을 드러낸다. 감독은 그녀들이 고양이 같다고 한다. 구속받기 싫어하고 창 너머를 동경하는 자유로운 고양이에게서 그녀들의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감독의 말대로 어딘지 위험스럽고, 조금은 비밀스럽고, 살짝 앙큼한 그녀들에게 어쩌면 “고양이”만큼 어울리는 이미지는 또 없을 것이다.
고양이 같은 그녀들의 이야기는 기존의 청춘 영화와는 다르다. 멋진 남자가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하지도 않고, 여선생의 치마속을 몰래 훔쳐보지도 않으며 노랑머리로 아저씨를 꾀지도 않는다. 그 대신 평범한 다섯 명의 여자아이들의 일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렇지만 이런 평범한 이야기가 내 마음을 젖어들게 한다. 꿈꾸고, 좌절하고, 상처받고, 사랑하기를 반복하는 그녀들은 내 모습이기도 하고 혹은 내 친구의 모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현실에서 도망갈 구멍만 찾는다. 혜주는 무엇이든 바꿀 수 있는 것은 다 바꿔보겠다고 다짐하고 지영은 무너진 집과 함께 말을 잃어버리고 태희는 가족사진에서 자신을 오려내고 멀리 떠나려고 한다. 그렇게 해서 가고 싶은 곳은 저 멀리 달나라다. 토끼가 있을지 아니면 분화구가 있을지 모르는 미지의 세상 말이다. 그녀들은 자유롭게 더 멀리 더 높이 날아가기 위해서 제 나름대로 살아간다. 나도 그 때 어디론가 떠나겠다고 짐을 싸들고 집을 나왔었다. 떠난다고 해서 마냥 자유롭고 홀가분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때의 난 그저 떠났다는 자체로 더할 수 없이 행복했었다. 그리고 그녀들도 그렇게 행복을 찾아 떠난다.
그런 그녀들을 지켜주는 것은 소중한 우정이다. 그녀들은 함께라서 상처받고 함께라서 행복하다. 가장 미워하는 사람도 그들이지만 가장 사랑하는 사람도 그들이다. 이제는 모두 달라져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지만 친구라는 이름은 우정이라는 이름은 여전히 그녀들을 모아주고 지켜주는 힘이다.
누구는 청춘이 참혹하다지만 사실은 아름답다. 벽에 부딪혀 날개가 부러져 꺾인다고 해서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다. 절망한다 해도 다시 웃을 수 있고 무엇을 잃는다해도 내가 갖게될 많은 것에 비하면 턱없이 작을 뿐이다. 다만 짧아서 안타깝고 애틋할 뿐 스무 살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모두들 현실에 지쳐 예전의 꿈을 망각한 채로 살아간다. 잠깐 여기 있는 이 고양이의 아름다운 눈을 바라보자. 아마도 잃어버렸던 푸르고 아린 스무살의 편린을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