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 자유화가 되던 88년 이후 대한민국에 일어난 유럽배낭여행 붐은 일시적 사회현상이 아닌 하나의 문화로 대학생들 사이에 정착한 듯 하다. 음, 괜히 거창하게 운을 띄운 것 같다. 뭐 주위에서도 심심찮게 접하는 친구나 선후배의 유럽여행담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대한민국 사람이 유럽일주를 할 때 꼭 빠지지않고 거치는 코스 중 하나가 프랑스 파리. 그중에서도 에펠탑, 루브르박물관 등이다. (샹제리제나 몽마르뜨는 유명세에 비해 시시하다는 소문이 퍼져 필수코스에는 끼지 못하는 추세란다) 에잇, 톡 까놓고 얘기하자. 요는 이렇다. 아직까지도 에펠탑, 루브르 등 파리의 명소들은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유럽여행의 목적지이다. 왜? 우선 가장 친숙하고 유명한데다, 무엇보다 사진 찍기가 기막히게 좋으니까. 일생에 한번 뿐일지 모르는 기회이니, 많이 찍어서 남기고 주위에 자랑삼고 싶은 순박한 마음을 어찌 탓하랴. 다만, 그러다보니 유럽여행은 사진여행이 되기 십상이요, 느는 것은 루브르의 입장 수입이라는... 그렇게 “프랑스와 파리에 대한 환상”은 과거 미국 등의 바통을 이어받은 동아시아 관광객의 몫이 되었고, 아직도 우리의 어스름한 기억 한구석에 동경으로 남아있음을 부정하기는 힘들 것이다. 우리 어머니들이 우아하고 유려한 발음으로 “불란서”를 찾을 때, 그네들의 얼굴에 스쳐가는 꿈꾸는 소녀의 표정을 떠올려보라. 사실 지금도 우리는 보졸레 와인과 랑콤, 샤넬 화장품에 혹하고 있지 않나.
○ 박제가 된 악령을 아십니까
벨파고는 한마디로, 루브르박물관을 배경으로 한 쌍의 남녀가 미이라에서 기어 나온 악령과 벌이는 한판승부가 아닌... 숨바꼭질이다. 최초로 루브르박물관에서 로케를 허락했다고 하는데, 모르고 보기엔 마치 박물관 측에서 입장수입이 떨어지자 자구책으로 기획한 어설픈 매직 쇼처럼 보인다. 물론 악령은 그 어설픈 매직 쇼를 주도하는 삐에로 같고. (필자는 툼레이더 리뷰를 올린 이후, 웬만하면 남들이 고생해서 만들고 애써 배급한 영화를 심하게 난도질하지는 말자는 개인적인 다짐을 했었다. 남 욕 하는 게 뭐 그리 좋겠는가 허나) 이 영화는 악몽을 기대하는 미스터리 호러 팬들에게 최악의 악몽을 선사한다. 그것은 다름아닌, 스릴도 공포도 전혀 맛 볼 수 없는 밋밋함과 지루함이다.
○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던데
그러나 시시하기로 소문난 이 영화에도 볼거리는 있다. 우선, 80년대 <라붐>으로 데뷔하여 당대 청소년들을(X세대로 분류되는 지금 2,30대 장정들) 무아지경과 가슴앓이로 몰아넣었던 소피 마르소의 여전한 아름다움. 브룩 쉴즈, 피비 케이츠 등 함께 당대를 풍미했던 공주들은 떠났지만, 그녀만은 꿋꿋이 스크린에 남아 추억을 달래주고 있다. 벨파고에서 그녀는 팬 서비스라도 하듯, 딱 한번 전라의 뒷모습을 보여준다. (혹자에게 이는 이 영화의 유일한 위안이 될 것) 물론 “지옥에 빠진 육체”,“나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 “구름 저편에” 등에서 그녀의 농염한 베드신을 충분히 감상한 관객이라면 싱겁게 느끼겠지만. 또한 지미 헨드릭스, 제니스 조플린, 짐 모리슨 등 이른바 요절 3인방의 추억을 공유하는, 한때는 Rock-kid였던 조연들의 로맨스그레이를 지켜보는 것도 재미라면 재미일 것. 그러나 루브르에 들러본 사람이라면, 무엇보다 큰 재미는 카메라와 함께 루브르박물관을 떠돌며 옛 여행의 추억을 곱씹는 것일 게다.
○ 과거의 영화를 잊지 못하는 프랑스
어떻게 이런 영화가 프랑스 흥행1위를 한 걸까. 아마도 해묵은 인기 TV시리즈에 대한 자국 관객들의 노스텔지어를 자극했을 터. 분명 흥행의 동력을 제공한 것은, 추억을 해치지 않고 고색창연함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벨파고]가 부활하기를 바라는 자국 관객의 기대심리에 부흥한 점일 게다.
90년대 중후반인가. 마티유 카소비츠의 <증오>를 보며, 참으로 오랜만에 즐거운 경악을 한 적이 있다. 프랑스 영화에서, 유럽 아트필름의 허울을 뒤집어 쓴 고만고만한 그간의 문예물들을 뛰어넘는 경지를 경험한 것이다. 그 후 프랑스에선 간간이 산뜻하고 신선한 영화들이 선을 보였고, 필자는 프랑스 영화가 대대적 변신을 준비 중이라는 강한 예감을 받았다. 그러나 [타인의 취향], [저스트 비지팅], [쁘띠 마르땅], [벨파고] 등 최근 개봉되는 일련의 프랑스 영화를 보면서 드는 생각은 이런 것이다. “젊은 감독들이 주도할 것 같던 프랑스 영화의 환골탈태”는 분명 좌절되었나 보다. 아니면 애초에 필자만의 “오버”였나. 모르겠다. [타인의 취향]은 좋은 작품이나, 그간 프랑스가 선뵌 동류의 문예물들과 비슷한데다, [책 읽어주는 여자]등에 비하면 어째 하수 같다.
[저스트 비지팅]은 [도시 속의 인디언], [비지터]등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쁘띠 마르땅]은 아직 못 봤지만, 소재가 벌써 좀 식상한다. 아직 [콜리야], [제8요일], [기쿠지로의 여름]의 기억도 가시지 않았기에. 그리고 무엇보다 [벨파고]는 앙상한 노스텔지어와 둔중한 매너리즘의 유령에 짓눌린 프랑스 영화의 오늘을 보는 듯해 안타깝기 그지없다. 이건 정말 필자의 “오버”이기를 바란다.
뤼미에르가 영화를 태동시킨 나라, 경외해 마지않는 트뤼포와 누벨바그의 나라 프랑스. 저 프랑스 혁명의 신화가 21세기 프랑스 영화에서 재현되기를 꿈꾸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