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엄청 떴다며?!
미국 내에서 이 영화가 일으킨 사회적 반향은 엄청났다고 한다. 미 국내에서 자동차 폭주족이 급증했음은 물론, 심지어는 미국 경찰이 영화의 개봉 이후 자동차 폭주에 대한 단속을 본격적으로 강화했다는 얘기까지 들려오는 판국이니, 흥행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겠다. "분노의 질주"는 3800만 달러의 비교적 (어디까지나 헐리웃 기준에서) 저예산으로 제작되었다. 그리고 벌써부터 일각에선 이 영화를 올 여름 가장 (투자 대비) 수익성 높은 영화로 지목하고 있다. "메멘토" "금발이 너무해"(국내 미개봉) 등을 압도하는 슬리퍼 히트라는 것. 과히 올 여름 블록버스터 전쟁 속에 단연 두각을 드러낸 "다크호스의 질주"였다고 할만하다.
어떤 내용이길래... 폭주족의 소행으로 추정되는 범죄를 추적하기 위해 LA의 젊은 경관이 직접 폭주족 소굴로 뛰어든다. 우선 카센터 직원으로 폭주족의 두목인 토렌토 주위를 맴돌던 주인공은 갖은 우여곡절 끝에 토렌토의 신임을 얻게되고, 마침내 폭주족의 일원으로 그들 속에 위장잠입 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그는 토렌토에게 인간적인 감정을 느끼게 되고, 그의 여동생 미아를 사랑하게 되는데... 스토리상으로만 보면. 새로운 것은 없다. 이 영화는 사실상 많은 부분 예전의 블록버스터들에 빚지고 있다. "분노의 질주"를 보는 영화광의 시각은 대충 아래와 같은 유형으로 정리가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그것들은 어쩌면 모두 타당할 것이다.
1. "폭풍 속으로"의 서핑이 아닌 카레이싱 버전.
2. 최근 개봉한 "드리븐"의 마이너리그 혹은 노동계급 버전.
3. "식스티 세컨즈"와 "폭풍의 질주"를 교묘히 섞어 만든 칵테일 무비.
그러나 문제는 재현이 아니라 재현의 방식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 영화에 수많은 젊은이들이 열광한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형사가 범죄의 소굴에 일원으로 위장잠입을 하고, 조직의 보스와 우정을 나눈다" TV시리즈를 비롯해 수많은 영화를 통해, 수도 없이 접해온 설정이다. 어디선가 본듯한 이런 설정은 식상한 감마저 준다. "도니 브래스코"(조니 뎁 & 알 파치노)와 "폭풍속으로"(패트릭 스웨이지 & 키에누 리브스)의 예에서도 볼 수 있듯이, 웬만큼 해서는 본전도 못 건지기 딱 좋은 소재인 것.
"범죄자와 위장동조자의 심리적 갈등과 유대"라는 설정은 한다하는 배우들의 카리스마와 공인된 연출력으로도 참신함을 불어넣기 어려운 것을 파악한 것일까. 영화는 이런 설정의 묘사에 치우치지 않는다. 주인공들의 관계의 초점을 정면돌파하기 보다는, 스릴 넘치는 상황과 잔재미, 그리고 혼을 빼놓는 카 액션으로 우회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분노의 질주"는 현시대를 사는 미국 젊은이들의 정서를 잘 포착했다. 어차피 "글로벌 스탠더드"가 실상 "아메리칸 스탠더드"와 동의어가 되어가는 것이 작금의 상황 아니던가. 자가용을 자신에 맞게 스스로 계량하는- 카 튜닝의 유행은, 신세기의 화두라 점쳐지는 DIY(Do It Yourself)열풍의 징후가 아닐까. "공자"까지 다국적 문화의 악세사리로 전락해버린 시류는 또 어떤가. (도올 김용옥 선생께서 이 영화를 보시면 경을 치실 장면이 있다!) 영화음악 또한 림프비즈킷의 히트곡 'Rollinr'부터 시작해, 하드코어와 메틀, 테크노로 딱 N세대의 감성에 맞추어 튜닝되어 있다. 목숨을 건 질주를 벌이지만, 주인공들에게는 돌아오는 것도, 남는 것도 없다. "그저 달리는 10여초동안 나는 자유로울 뿐야"라는 토렌토의 대사는 영화를 한마디로 요약한다. 좌절된 꿈을 뒤로하고 스피드가 선사하는 순간의 쾌감에 집착하는 토렌토와 그 일당들. 그들의 모습은 과연 대학로 폭주족 아이들과 얼마나 다른 것일까. 카레이서들은 돈과 명예, 또는 사랑을 위해서 질주한다. 그럼 "분노의 질주"의 주인공들은? 그저 재미로 할뿐이다.
유일하게 "범인 검거"라는 목적의식을 가졌던 주인공마저도, 라스트에서 범인을 놔줌으로써 질주의 의미를 부정하고 만다. (그는 그 잘난 헐리우드 영웅의 집합소인 LA PD 소속 경관이다) 이 영화는 은연 중에 현실도피를 갈망하는 젊은이들의 허무주의를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사족
이 영화에선 반가운 얼굴을 볼 수 있다. 한때 월스트리트의 잘 나가는 증권분석가였다가 헐리우드에서 모델 겸 배우로 활동을 하고 있는 한국계 미국인 "릭윤". "삼나무에 내리는 눈" 이후 국내 관객과 스크린으로 만나기는 처음인 듯. 그러나, 미국 내에서 동양인의 위상을 바로 세우고 싶어서 배우가 되었다는 그의 야심찬 데뷔 때의 선언은 잊으시길. 인근에서 범죄를 일삼는 중국계 폭주족 집단의 두목 역으로 출연한다. 동양인에 대한 헐리우드의 스테레오 타입을 재차 확인하는 씁쓸함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