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교포 3세대 양영희의 전작 <디어 평양>은 기술적 기교도 허심탄회한 눈물도 없이 담담했다. 이 목소리가 와 닿았던 이유는 북한과 일본 사이에서 숨 쉬던 당사자들의 목소리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서였다. 10년의 기록이었던 <디어 평양>에 3년이 보태진 <굿바이, 평양>은 세대가 바뀐 후일담이다. 전작이 조총련 열혈 간부였던 아버지와 젊은 2세대 상징 같은 감독 본인에게 집중한다면, <굿바이, 평양>은 오빠의 어린 막내 딸 선화라는 새로운 세대를 축으로 돌아간다.
북한의 허가 없이 촬영하고 공개된 전작과 비교해 정치성에 대한 조심스러운 발걸음은 그대로다. 하지만 몇몇 장면에서는 내레이션을 통해 솔직한 입장을 내비치는 데 적극적인 순간이 존재한다. 어린이 예술단의 공연 ‘평양성의 소녀’는 20년 동안 변함이 없다. 공연을 볼 때마다 좋아하는 어머니와 달리 감독은 기분이 우울해진다고 소회한다. 아이들의 완벽한 공연은 언제 봐도 그로테스크하고 감독은 좀 더 피부에 와 닿는 복잡다단함을 내비친다.
<디어 평양>을 본 관객들의 반응은 ‘저 곳도 사람이 사는 곳이구나’라는 단순하지만 당연한 진리였다. 두 나라 사이를 오가는 괴리와 담담한 관찰은 극적인 장치 없이 이야기를 변화무쌍하게 만든다. 전작에서 정전으로 암흑이 된 방 한 켠에서 쇼팽을 연주하던 어린 소년은 짧은 순간 어떤 전율을 선사했다. 그 쇼팽의 피아노는 <굿바이, 평양>에서는 교정기를 한 선화의 얼굴로 대체된다. 절도 있는 매스 게임과 평양예술단 혹은 광대뼈가 튀어나온 북한 어린이들의 비참한 모습 등 단편적으로 각인되어 있던 북한은 훨씬 다채롭다.
제목에서 대구를 이루는 <디어 평양>과 <굿바이, 평양>은 진귀한 역사적 기록이 된다. 양영희 감독은 전작 상영 탓에 북한 입국이 금지되었고, 이 진귀한 기록이 이어질지는 알 수 없다. 영화 공개를 앞두고 말을 아끼던 감독의 말처럼 말해지는 것보다 말해지지 못한 여백을 더 많이 살피며 봐야 한다는 것은 옳다.
2011년 2월 28일 월요일 | 글_프리랜서 양현주(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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