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푸른 수염>의 원작은 유럽의 민담을 샤를 페레가 각색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동화다. 어려서 우리가 읽고 듣고 자란 동화에는 잔혹하고 비정한 에피소드가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는 게 기정사실이지만, 푸른 수염은 이들과 비교가 힘든 엽기 호러물 수준이다. 그는 여섯 명의 아내를 잔인하게 죽인 연쇄살인마, 그리고 시체를 매달아놓은 방의 열쇠를 일곱 번째 부인에게 쥐어주면서 그곳에 들어가지 말라고 당부하는 사이코다. 아무리 미화, 순화시키려 해도 애초에 구조적으로 가능하지가 않은, 어린이들에게 읽어주려니 어딘가 찝찝한 마음을 떨쳐내기 힘든 독특한 이야기다.
사실 <푸른 수염>의 테마는 전 인류가 공유하고 있는 ‘금기’의 모티브라고 할 수 있다. 세계의 어떤 신화, 어떤 전설에서도 ‘이것은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금기가 한두 개쯤 등장한다. 그리고 그 금기는 지켜지는 법이 없다. 성경에서도 아담은 금단의 과실을 먹고 금기를 범하면서 낙원에서 쫓겨나고, 결과적으로 자기 삶에 입문하는 계기가 된다. 어떤 의미에서 <푸른 수염>의 남자는 카트린느에게 있어서는 절대자의 위치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의 딸이었던 그녀는 푸른 수염과 결혼하면서 원하는 건 다 얻을 수 있는 호사를 누리게 된다. 금기에 복종하는 한에서 말이다. 푸른 수염은 카트린느가 아무것도 모르는 ‘무’의 상태로 있기를 바랐을 것이나. 한편 그녀가 금기를 깰 것을 이미 예상하고 열쇠를 주었을 것이다.
원작과는 다르게, 영화에서는 ‘자매’라는 설정이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한다. 카트린느 브레야 감독은 “영화 속 자매의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다. 자매 중 둘째의 삶은 끔찍하다”고 말한 바 있다.(이런 점은 2001년작 <팻 걸>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카트린느가 결혼 후 푸른 수염에게 “언니가 무척 보고 싶다. 하지만 떨어져 있어서 좋기도 하다”는 말을 한 건 의미심장하다. 그녀가 언니에게 사랑과 콤플렉스가 뒤섞인 애증을 가지고 있다는 뉘앙스는 곳곳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그녀는 다른 삶을 살고 싶어 했고, 다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알고 싶어 하는 능동적인 의지가 필요하다. 그녀는 알기 위해 금기를 깬다. 감독은 금기라는 원형적인 모티브에 두 자매간의 미묘한 이야기를 절묘하게 얹어놓은 셈이다.
참고로 <푸른 수염> 이야기는 15세기 프랑스에서 악명을 떨쳤던 연쇄살인마 질 드레의 생애가 그 시조라고 알려져 있다. 그는 연쇄살인뿐만 아니라 네크로필리아(Necrophillia : 시체애호증) 성향이 있었다고 한다. 영화에도 이와 비슷한 코드가 드러난다. 어린 카트린느가 아버지의 시체에 키스하며 젊어 보이고 멋있다고 말하는 장면은 복선이다. 이 장면은 푸른 수염이 죽은 뒤, 그녀가 푸른 수염의 잘린 목을 몽롱한 표정으로 쓰다듬는 엔딩과 연결된다. 미학이라면 미학이고 악취미라면 악취미겠지만, 전체적으로 푸르고 창백한 톤으로 표현된 이런 신들은 회화적이라 아름답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마치 살로메의 촌극, 혹은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벤 유디트를 연상시키는 초현실적이고 섹슈얼리티가 흐르는 비주얼이다.
영화의 러닝타임은 80분이다. 게다가 현실에서 동화를 읽는 어린 자매와, 실제 <푸른 수염> 이야기를 오가는 액자식 구성을 감안한다면 아쉬울 정도로 간결하다. <팻 걸> <로망스> 등 발표하는 족족 논쟁거리를 제공했던 감독의 전작들과 비교한다면, <푸른 수염>은 확실히 덜 쇼킹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더 독하기도 하다. 전반적으로 절제된 연출과 화면으로 일관하고 있는데, 이런 점이 오히려 잔혹동화가 지닌 본질을 죽이지 않고 부각시킨다. 공포와 불안, 기묘한 아름다움이 팽팽한 실처럼 가로지르고 있는 어둠의 판타지다.
2010년 3월 31일 수요일 | 글_최승우 월간 PAPER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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