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청춘남녀가 우연한 계기로 만난다. 남자는 능력은 있지만 뭔가 꼬여있고 까칠하다. 원칙대로 일을 해야 하는 여자는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고, 둘은 사사건건 부딪힌다. 싸우다 정이 든다고, 그들은 눈이 맞지만 서로의 마음을 표현하는 데에는 서투르다. 결정적인 순간 남자는 모든 걸 멋지게 마무리하고 여자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배경은 아름답고 평화로운 바닷가 마을이다. 이쯤이면 드라마의 조건은 다 갖추어져 있는 셈이다. 7할 이상은 예상이 가능해지는 수순이다.
<하이자오 7번지>는 스토리와 설정상 로맨틱 코미디의 전형적인 교본을 그대로 답습한다. 그리고 굉장히 많은 것들이 들어있는 영화다. 많은 캐릭터, 많은 에피소드, 많은 위트. 특히 막강 조연들이 아가와 토모코의 주변에 포진해있다. 술만 마시면 떠나간 아내 이야기를 하는 특공대 출신의 경찰, ‘월금’이라는 옛날 악기밖에 못 다루면서 록 밴드 무대에 서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할아버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당돌한 초등학생, 얼떨결에 밴드 베이시스트가 된 전통주 영업사원 등. 실제 일본의 유명가수인 아타리 코스케가 특별출연한다. 하여튼 이 영화에는 뭔가 굉장히 많다. 없는 것은 응집력뿐이다. 재료는 차고도 넘치지만, 냉정하게 말하면 그것들을 잘 조합하려는 의지가 없어 보인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어떻게든 구겨 넣고 싶어 하는 감독의 과욕이라도 드러나는가 하면, 그마저도 아니다. 129분이라는 길고 긴 시간을 각종 캐릭터와 에피소드가 약탈하듯 나눠 가져가는데, 그것들이 어떤 연결고리와 인과관계를 이루지 못하고 허무하게 공중분해가 되어버린다. 예를 들어 아가와 토모코는 어떤 이유로 싸우는가, 뭔가 사연이 있는 듯한 호텔 청소부의 비하인드 스토리는 무엇인가, 오합지졸 아마추어에 불과하던 동네 밴드가 어떻게 성공적인 공연을 하게 되는가 등을 명료하게 보여주지 못하고 여러 모로 관객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아가가 보내지 않은 편지에는 패전으로 대만을 떠나야 했던 일본 청년과 그를 잊지 못하는 대만 여성의 러브스토리가 들어있다. 감독은 60년 만에 전해진 편지의 사연을 아가와 토모코의 관계를 잇는 중요한 매개체로 사용하려고 한 듯하다. 그러나 영화 내내 내레이션과 복선처럼 깔리는 편지 구절은 어떤 정서적 공감대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세월을 훌쩍 건너 남녀 주인공의 사랑을 잇는 아교가 되는 목적 달성에 실패했을뿐더러, 아예 영화에서 통째로 들어내더라도 크게 별 지장이 없을 정도다. 이야기의 초점이 사실상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하이자오 7번지>는 <색, 계>, <말할 수 없는 비밀> 등을 제치고 대만 내 중어권 영화의 흥행기록을 갈아치웠다고 한다. 일본인과 대만인의 사랑이라는 소재 때문에, 대일 과거사에 민감한 중국에서는 우여곡절 끝에 정부가 상영을 허가했다는 소식도 들린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런 부수적인 이야깃거리들 외에는 딱히 언급할 만한 구석이 없다. 통속적이긴 해도 웰 메이드 로맨틱 코미디가 될 수 있었던 조건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혼란스럽고 아쉬운 결과물이 되고 말았다.
2010년 3월 12일 금요일 | 글_최승우 월간 PAPER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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