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머리 휘날리는 청초한 여인에 대한 로망을 품은 남자의 얘기가 아니다. 백마 탄 왕자와의 로망을 꿈꾸는 여자의 얘기도 아니다. <로망은 없다>는 내 사람만 되어 주면, 별도 달도 따다 주겠다고,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당신 하나만 바라보겠노라 다짐하며 하나가 됐지만 세월의 흐름 속에 이를 잊고 살았던 중년 부부가 과거의 로망을 추억하는 이야기다. 한국영화아카데미 출신인 박재옥, 수경, 홍은지는 왕년에 수줍음 많은 청년이었지만, 결혼 후 세상에서 제일로 무뚝뚝한 남자로 변하는 우리네 아버지와 한때는 감성 충만한 소녀였지만, 결혼 후 낭만이라곤 약에 쓰려고 해도 찾을 수 없게 된 억척스러운 어머니 등 내 주위에서 혹은 당신 주위에서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중년 부부의 삶을 소박한 그림과 한국적인 정서 안에 뚝배기처럼 담아냈다.
추적추적 비 내리는 밤. 황순복씨와 고영숙 여사의 결혼기념일을 맞아 그들의 세 딸과 아들이 한 자리에 모인다. 기념일 파티를 위해 양평으로 고기를 먹으러 가자고 조르는 황씨의 의견은 집에서 족발이나 뜯어 먹으라는 고영숙씨의 주장 앞에 힘을 잃는다. 별 것 아닌 일에 아옹다옹 싸우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들의 아이들은 갑자기 궁금해진다. “과연 엄마, 아빠는 어떻게 만나 사랑을 했을까?” 그때부터 황순복씨와 고영숙 여사는 자신들의 지난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한다. 중매를 통한 첫 만남과, 긴장됐던 데이트의 순간들, 신혼의 기억과 고부간의 갈등 등이 하나하나 쌓인다.
바라만 봐도 나를 설레게 했던 사람이, 어느새 아무리 봐도 감흥 못주는 사람이 됐다. 남자는 엄마처럼 잔소리를 해 대는 아내가 못마땅하고, 여자는 아이처럼 삐치기 일쑤인 남편이 섭섭하다. 그래도 사랑보다 정이 더 무섭다고, 내색은 안 하지만 이들 사이엔 요즘 세대의 사랑이 갖지 못한 견고한 신뢰가 있다. 결혼 20년차를 맞은 이들의 사랑은 불꽃같이 치열하지도 폭풍처럼 격렬하지 않다. 때론 권태롭고, 때론 무기력하기다. 하지만 <로망은 없다>는 서로가 서로에게 너무 당연한 존재가 되어 버린 부부를 애써 과거의 순간순간으로 데리고 간다. 그리고 이를 통해 결혼과 인생에 대한 깊은 성찰을 보여주는가 하면, 가족 간의 사랑도 은은하게 버무려낸다. 많은 TV 드라마가 중년의 사랑을 불륜, 복수 등 말초적인 코드로 그리고 있는 요즘같이 하수상한 시절에 그들의 안겨주는 소소하고도 건전한 웃음이 반갑기 그지없다.
사실, 픽사와 디즈니로 대표되는 미국의 3D애니메이션과, 높은 기술을 갖춘 재패니메이션에 길들여진 우리에게 <로망과 없다>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애니메이션일지 모른다. 조악한 그림에, 단순한 캐릭터 움직임, 프로보다 아마추어의 느낌이 강한 성우의 목소리 등. <로망은 없다>는 상업영화의 기준으로 놓고 봤을 때 수많은 단점을 들어낸다. 누군가에게는 평점 1점주기도 아까운 허술한 애니메이션으로 기록될 수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는 결코 미워 할 수 없는, 그리고 저항할 수 없는 그만의 매력이 담겨있다. 향수를 자극하는 진솔한 이야기가 그러하거니와 요즘 유행하는 ‘남녀탐구생활’의 에피소드로 사용해도 무방할 법한 남녀에 관한 기상천외한 에피소드들이 유쾌하기 때문이다. 생활밀착형 대화들이 쏟아내는 감칠맛 나는 대사와 수채화를 배경으로 이어지는 아날로그적인 화면 역시 빼 놓을 수 없는 <로망은 없다> 만의 매력이다.
특히 이 작품이 2억원이라는 최소한의 제작비와 척박한 시스템 위에 탄생한 사연 있는 영화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러한 애정의 시선은 더 깊어질 수밖에 없다. 어쩌면 어려운 환경 속에서 뚝심 하나로 완성된 2009년 유일의 한국장편애니메이션 <로망은 없다>는 한국 애니메이션의 잃어버린 로망을 역설하는 작품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한국장편애니메이션 부활을 위해, 사라진 로망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이 있음을 알린다는 점에서 묘한 여운을 안기는 작품이기도 하다.
2009년 12월 14일 월요일 | 글_정시우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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