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만 듣고는 전혀 감이 오지 않는 영화였다. <저녁의 게임>? 상징적인 의미라고만 생각했는데, 그 게임이 화투놀이일 줄이야. 그렇다고 타짜 영화는 아니다. 저녁의 게임이 의미하는 것은 상처를 통해 서로를 증오하는 아버지와 딸의 유일한 소통 방법을 의미한다. 질곡의 세월을 살아온 부녀, 그 잔인하고도 끈끈한 연은 35년의 세월을 꾸준히 이어져 오면서 서로를 침전하는 인생의 굴레에 가두고 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폭력으로 귀가 멀어버린 성재(하희경)는 집으로 오는 길에 트럭의 경적소리를 듣지 못한 채 앞서다가 트럭 운전수에게 뺨을 맞는다. 집에 돌아온 성재는 치매에 걸린 아버지(정재진)를 위해 무던하게 식사를 준비하고, 아버지는 이웃집 꼬마(안찬우)와 성재에게 끊임없이 중얼거리며 불만을 늘어뜨린다. 수제비가 뜨겁다며, 미끄럽다며, 떠먹여달라며 투정을 부리다 급기야 그릇을 엎는 아버지. 어렸을 적 아버지의 폭력으로 어머니와 오빠를 잃었지만, 성재는 늙은 아버지를 떠나지 못하고 직접 목욕까지 시키며 보살핀다. 어느 날, 탈옥수(윤배영)가 갑작스럽게 성재의 집에 들이닥치고, 성재는 그를 통해 잊어버리고 있었던 자유와 성, 자신의 존재를 다시 확인하게 된다. 그날 밤 성재는, 아버지와의 화투놀이에서 그동안 참았던 분노를 분출한다.
<저녁의 게임>은 무덤과도 같은 삶에 색다른 변화를 바라는 영화다. 듣지도, 말하지도 못해 세상과 단절된 성재는 치매에 걸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늙은 아버지를 보살펴주면서 하루하루 시간만 흘려보낸다. 그동안 자신의 욕망이나 바람 따위에 전혀 신경을 쓰지 못한 성재는 탈옥수와의 짧지만 강렬한 만남으로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욕망이 뒤섞인 판타지를 꿈꾸게 된다. 하지만 영화 속에 드러난 성재의 판타지에는 뚜렷한 목적이 드러나지 않는다. 지옥 같은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매 순간이 모두 판타지로 표현된다. 이러한 성재의 행동은 오래 전부터 자신의 욕망만을 충족하고 살아온 아버지와 상반되게 표현돼 성재의 아픔을 더욱 절절하게 전한다.
이 영화는 오정희의 단편 소설 <저녁의 게임>에서 모티프를 얻어 만들었다. 메마르고 서늘한 소설의 분위기 속에서 몇 가지 주요 요소를 바꾸어 다른 이야기로 만들어냈다. 특히 남성감독이 연출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복잡한 심리와 정체성을 깊이 있는 시각으로 묘사했다는 것이 특징이다. 심지어 여성감독의 작품만이 상영될 수 있는 프랑스 크리떼이유국제여성영화제에서 러브콜을 받기도 했다. 비록 남성감독의 작품이었다는 것을 알고 초청이 무산됐지만, 남성감독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여성의 심리를 섬세하게 표현했기에 벌어진 해프닝이었다.
연출을 맡은 최위안 감독은 충무로에서 조감독을 거쳐 방송으로 넘어온 인물이다. 하지만 TV에서 드라마를 찍던 시절에도 필름 카메라를 사용해 영화적인 비주얼을 만들어내곤 했다. KBS를 거쳐 MBC로 자리를 옮긴 후에도 MBC특집극, 베스트극장 등 드라마 위주로 작업하면서 감각을 보였고, <저녁의 게임>을 통해 마침내 영화감독으로 데뷔했다. 데뷔작에서 그는 연출, 제작, 각본, 촬영, 미술 등을 모두 소화해 내며 왕성한 활동 영역을 자랑했고, 4억이라는 적은 예산으로 완성된 작품은 여러 해외 영화제에 초청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저녁의 게임>은 무료하고 피폐한 일상을 비집고 들어온 욕망을 다룬다. 때로는 성적으로, 때로는 폭력적으로 그려지는 원초적인 욕망은 우리의 일상을 더욱 건조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새로운 탈출구를 제시하기도 한다. 비록 에로틱한 시선에 편중돼 욕망의 근원을 묘사하고, 일상과 판타지를 균일하게 배치하지 못했다는 점은 아쉽지만, 숨이 막힐 정도로 무료한 일상과 대조를 이루는 탐미적인 영상은 영화를 돋보이게 하는 또 다른 힘이다.
2009년 10월 23일 금요일 | 글_김도형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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