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남자다. 김장훈의 노래 제목이기도 한 이 말은 거창한 선언이 아니다. 여자 못지 않게 남자에게도 지워진 굴레가 많은데 그런 짐들에 스스로 함몰되는 남자도 많지만 거부하는(남들이 보기에는 낙오하는) 남자들도 있다. 거창하게 우리 사회의 가부장제 이데올로기 따위를 언급하려는 게 아니라 그저 한 사람의 남자로서 원하는 꿈을 말하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브랜단 앤 트루디]는 남자영화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증상을 지닌 남자들에게 이 영화를 권한다.
1. 영화광이기는 한데 영화를 다른 용도(?)로 이용하는 남자
브랜단은 지독한 영화광이다. 혼자서도 명작은 빼놓지 않고 찾아본다. [브랜단 앤 트루디]는 이런 브랜단의 삶을 여러 영화의 패러디와 오마쥬로써 보여준다. 솔직히 이 영화가 오마쥬를 바치는 영화 중 아는 것은 [네 멋대로 해라] 밖에 없다. 그보다 더 흥미로운 건 브랜단이 트루디와의 연애과정에서 영화를 인용하는 장면들이다. 영화를 영화 자체로도 좋아하지만, 영화 속의 낭만적인 장면이나 근사한 프로포즈를 구애에 사용하고픈 생각이 드는 남자는 이 영화를 유심히 봐야 한다. 왜냐하면 브랜단은 그 방면에서 굉장한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아비정전]에서 장국영이 장만옥을 꼬실 때(객관적으로 "꼬셨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쓴 방법을 좋아하고 인용하려 시도했던 적도 있다. 왜 있지 않은가? 장국영이 콜라를 사러 갔다가 무작정 장만옥을 붙잡고 1분 동안만 같이 시계를 보자고 하는 장면 말이다. 그리고 나서 "1960년 4월 16일 오후 3시. 우린 1분 동안 함께 했어. 난 잊지 않을 거야. 우리 둘만의 소중했던 1분을. 이 1분은 지울 수 없어. 이미 과거가 됐으니." 라고 말한다. 음, 실제로 이 장면을 써먹는다면 닭살 돋는 걸 견딜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을 얻는다면 그 닭살쯤은 대패로 쓱쓱 갈아내면 될 일이고, 이런 프로포즈를 받은 여자도 남자가 맘에 든다면 절대 유치하다고 느끼지 않을 것이다. 아마 브랜단이 우스꽝스럽게 성가를 부를 때 바라보던 트루디 같은 표정을 짖지 않을까?
2. 일상의 무게에 짓눌려 허덕이는 남자
남자의 일상은 피곤하다. 직장에서는 상사와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고, 집에 와도 쉴 자리는 없고 그저 '돈 버는 기계' 정도로 밖에 인식되지 않는다. 아무리 아로나민 골드, 컨디션을 먹어도 그 피로는 쉽사리 풀어지지 않는다. 브랜단의 직업은 선생이다. 그렇게 능력 있는 선생도 아니고 학생의 존경을 받는 타입은 더더욱 아니다. 브랜단에게 선생이란 직업은 지루한 일상 그 자체이고 그럼에도 일탈을 꿈꿀 엄두도 못내는 감옥이다. 브랜단은 [순애보]의 이정재와 참 많이 닮아있다. 공무원이라는 직업도 그렇고 이정재가 밤새 포르노 사이트를 뒤지듯 브랜단은 남루한 삶을 숨기기 위해 어두운 영화관으로 숨어든다.
그런 브랜단이 트루디를 만나면서 조금씩 변화하게 된다. 섹스의 즐거움을 알게 되고 조금씩 자신을 표현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전부 트루디에게 잘 보이기 위해 하는 짓이지만, 그 행동들은 브랜단이 삶의 자신감을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영화에는 브랜단이 성가를 부르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온다. 차츰 브랜단이 성가를 부르는 태도가 변화하는데 이는 트루디와의 사랑을 통해 그의 삶이 조금씩 주제적으로 변하는 과정의 가장 극적인 표현이다. [브랜단 앤 트루디]는 연애담이지만, 한 남자의 뒤늦은 성장영화이기도 하다. 요즘은 대학신입생 때부터 고시니, 취직준비니 하는 문제에 매달리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삶을 너무 성급히 결정지으려는 남자들, 그리고 그렇게 결정한 의미없는 일상에 질질 끌려가는 남자들에게 브랜단의 '늦바람'을 닮아보라고 권하고 싶다.
3. 순애보를 꿈꾸는 남자
요즘은 좀 덜하지만 영화 속에 나오는 남자의 전형적인 모습은 마초나 플레이보이, 혹은 팔방미인들이 많았다. 사랑에 임하는 자세도 적극적이다 못해 전투적이고 순간의 쾌락을 찾는 남자들이 다수 등장한다. 하지만, 현실의 남자는 그렇지 않다. 사랑에 목말라하고, 아파하며, 자신만의 순애보를 꿈꾸는 남자도 많이 있다. 유행가의 가사는 유치하다고들 하지만, 누구나 한번쯤 저거 내 이야긴데 하는 생각을 가져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의 삶과 닮아있기 때문이다. 이런 가사가 있다. "남자는 첫사랑을 잊지 못한대. 나도 잊는 걸 이젠 포기해 버렸어"
남자의 입장에서 말하는 일방적인 의견이지만, 남자가 사랑에 더 맹목적이고 여자보다 계산적이지 못하다. 브랜단도 한심한 자신의 일상에 생기를 불어넣어 준 트루디의 직업이 도둑이어도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연쇄살인마는 안 된다!). 오히려 그녀의 세계에 편입돼서 함께 도둑질을 하고 심지어 자기 누나네 집까지 턴다. 하나에서 열까지 트루디에게 끌려다니지만, 마냥 행복하다. 예전에도 드물지만 이런 순정남을 본 적이 있다. [기쁜 우리 젊은날의]의 안성기나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의 철수, 혹은 [인질]의 이완 맥그리거를 부러워하는 남자라면 이 영화를 꼭 봐야 한다. 그리고 브랜단이 한없이 부러워지고 질투를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남자들에게 자신에게 찾아볼 순애보를 포기하지 않고 끈기있게 기다리라고 말하고 싶다.
4. 기타
그밖에 꼭 남자가 아니더라도, 학창시절 아픈 기억(정신적으로든, 아니면 [친구]처럼 육체적으로든)으로 선생이 싫은 사람, 컴퓨터가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고 생각하는 사람, TV 미니시리즈 [ER]에 빠져 자신의 할 일을 망각하는 사람, 그리고 몬테소리 교사(?)한테도 이 영화를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