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마다 차이가 있지만, 영화 볼 때의 관전 포인트는 일반적인 몇 가지 범주에서 형성된다. 엄청난 액션의 물량 공세에 온몸을 불사른다. 감동으로 인해 가슴에서 무언가 울컥울컥 올라온다. 오락적 재미는 없어도 작품성 하나 만은 기립하여 손바닥 쩍쩍 박수칠 수 있다. 딴 거 다 집어 쳐라~! 웃기고 재밌으면 장땡이다~! 아니면, 어머~! 저 놈이 범인? 아~반전 끝장나. 몸매 감상하다 2시간 다 보냈다. 부대끼는 몸들과 거친 숨소리 향연에 온 몸 추스를 길 없었네. 이렇게 지 아무리 잘난 영화여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본다. 하지만 간혹, 아무것에도 속하지 않는 영화가 있다. 애초부터 액션이나 스릴러, 멜로가 아니기에 드라마적인 구성에서 감동으로 집중했어야 할 영화지만, 감동까지는 아니어도 소소한 재미나 별 다른 의미도 찾아내기 어려웠던 영화. 안타깝게도 그 영화가 <여름, 속삭임>이다.
영조(이영은)와 윤수(하석진)는 노교수(최종원)의 미국 방문으로 인해 여름내 교수의 집을 드나든다. 조교인 영조는 몇 천권의 책 정리. 화원을 운영하는 윤수는 교수의 난 관리. 하지만 그들은 같은 공간에 머물다 가면서도 서로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 그러다 알레르기로 인해 고양이를 방안에 가둬두는 영조에게 동물 학대라는 누명을 씌우며 윤수가 메모를 남기고, 둘은 서로의 존재를 알아간다. 하지만 둘의 소통은 참 더디고 진전이 없다. 메모 한 장으로 사랑이 싹트길 기대하는 건 너무 앞서나간 생각으로 치부 될지 모른다. 하지만 영화의 반 이상을 남녀 주인공이 서로의 얼굴도 모르게 하면서, 유일한 소통인 메모까지도 ‘니가 잘났네, 내가 잘났네.’ 하는 의미 없는 도구로 전락해 버린 건 안타까운 일이다.
애석한 점은 노교수 부부의 이야기에서도 보인다. 평소 금술이 좋았던 아내가 죽자 노교수는 쓸쓸해하며 젊은 시절 아내와 나누었던 편지들을 살피고, 그녀가 정성들였던 난을 가꾼다. 하지만 영화 속 회상 장면에서 나오는 노교수의 과거 추억은, 말 그대로 회상일 뿐이지 현실의 어떤 지점을 끌어내어 구체화 시키거나, 영조와 윤수의 호감에 동기가 되지 못한다. 또한 감춰짐이나 애틋함 없이 너무 일찍부터 서로의 관계가 대화 안에서 적나라하게 풀려버리고, 여러 번 부딪혔음에도 마지막에 가서야 영조의 이름을 확인하며 놀라는 윤수의 모습은 궁금증의 해소보다는 ‘저걸 인제 알았다고?’ 억지스러움에 실소를 막을 길이 없다.
영화는 처음이 있고 결국은 끝이 있으나 과정의 두서가 없다. 중간 중간 책의 단락을 나누듯 소제목 안에서 나뉘는 영화의 단락은 별 의미가 없고 몰입을 방해하기에 불편스럽다. 또한 책, 편지, 타자기, 난, 고양이 등이 소품이라 하기엔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서로를 이어주는 도구로도 사용되지만, 하나로 응축되지 못하고 마지막엔 의미 없이 소진된다. 인물간의 인과관계도 촘촘하지 못하고, 그로 인해 영화의 주제가 노부부의 애틋한 마음인지, 아니면 새로이 관계될 젊은이들의 사랑인지, 그도 아니면 얼굴은 알지 못하더라도 서로를 돕고 의지할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의 정서가 인간에게 있다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여름, 속삭임>은 18년 만에 감독 데뷔를 하는 김은주 감독의 첫 번째 작품이다. 하지만 18년의 내공을 첫 작품에서 완성시키기엔 힘이 부쳐 보인다. 비록 연기를 정말 연기처럼 하는 두 주인공과, 저예산 영화가 가진 미숙할 수밖에 없는 디테일의 한계가 현실이기에 어쩔 수 없노라 해도, 영화의 흐름을 잡고 주제를 밀착시키는 영민함은 분명 감독의 몫이다.
2008년 10월 10일 금요일 | 글_김선영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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