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는 1970년대 영국의 흑인 노예상이었던 존 뉴턴이 인간적 양심을 깨닫고 종교인으로 거듭났다는 일화를 바탕으로 신에게 겸허한 감사를 표현하는 가사를 담고 있는 찬송가다. 이는 그의 작사가 이뤄진 1779년에 윌리엄 카우퍼와 함께 펴낸 올니 찬송가(Olney Hymns)에 수록된 뒤, 현재에 이르러 나나 무스꾸리 같은 유명 가수의 목소리로 불려질 정도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찬송가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인간의 숭고한 변화를 원형으로 한 찬송가 제목을 영화의 제목으로 옮긴 <그레이스>는 영국의 기득권과 맞서 흑인노예제도 철폐에 앞장섰으며 끝내 이를 실현시킨 하원의원 윌리엄 윌버포스(이안 그루퍼드)에 대한 전기적 일화다. 동명의 찬송가가 인간의 숭고한 변화를 종교적 찬양으로 격상시킨다면 <그레이스>는 인간의 작은 의지가 완수한 커다란 변화를 이야기한다. 동시에 윌버포스의 일대기가 존 뉴턴(알버트 피니)이 작사한 곡의 제목으로 내걸린 이유는 찬송가의 원형이 신에 대한 헌사이기 전에 흑인노예상이라는 비양심적 직업에 대한 성찰과도 직결되기 때문이다.
윌버포스는 정의를 위해 기득권에 맞서는 진보적 인물이다. 그는 국익보단 인간의 존엄성이 우선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진실을 말하는 자는 위험해진다는 걸 모르는군.’이라고 빈정대는 늙은 하원의원들 앞에서 노예제도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레이스>는 모두가 그렇다고 할 때 아니라고 말한 1인에 관한 이야기며 그 1인에 해당되는 윌버포스는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감동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될 인물이다. 영화가 그의 격렬한 열정을 비추기 전에 서사의 일부를 뒤바꾸며 암초에 부딪힌 열정의 쇠락을 먼저 드러내는 건 고난을 통해 숭고한 결심을 더욱 값지게 드러내기 위해서다.
물론 어떤 방식을 동원했다 하더라도 <그레이스>가 담고 있는 진실의 값어치는 충분하며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실존의 서사가 애초에 지녔던 숙명적인 숭고함을 퇴색시키지 않는다. 다만 마치 유머감각 없는 목사님의 설교처럼 지루함을 배제할 수 없다는 건 <그레이스>가 전달하려는 숭고한 감동을 앙상하게 만들 여지가 있다. 본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가 본연의 목소리 전달에 충실했을지라도 평범한 위인전기를 보는 것과 같은 영화는 감동에 도달하기 전에 혹사당하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문장은 숭고하지만 그 문법이 지루함은 어쩔 수 없다.
한편, <그레이스>는 영화의 자의와 무관하게 종교적인 오해를 부를 여지도 충분해 보인다. 찬송가의 함의와 무관하게 단지 그것이 불려진다는 것만으로도 종교적 거부감을 자극할만하며 이는 한편으로 단순히 종교적 목적의 관람자에겐 그 방향의 감상에 치우치게 만들 요인이기도 하다. 아마도 <그레이스>에 절실히 필요한 건 영화를 보는 관객의 평형감각이 아닐까 싶다. 적어도 본질적 가치가 전도(顚倒)되지 않는 영화의 양심적 교훈이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님을 찬송하자는 전도(傳道)의 일환으로 활용되어서는 곤란할 것 같다. 무엇보다도 인간의 신념과 결단이야말로 인간의 존엄성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이 <그레이스>가 전하는 궁극적 교리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2008년 3월 6일 목요일 | 글: 민용준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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