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디테일한 삶의 방식을 의인화했을 뿐, 꿀벌의 메커니즘에 종속된 그들의 라이프 스타일은 한번 직장은 평생 직장이며 삶은 죽도록 일만 하다 가는 운명일 뿐이다. 하지만 이제 막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 초년생 꿀벌로서 평생 직장을 골라야 하는 배리(유재석)에게 꿀벌의 세계는 지독하게 따분할 뿐이다. 그런 그에게 벌집 밖의 다이나믹한 세상을 비행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어린 꿀벌 소년의 세상 나들이와 함께 대소동도 비로소 시작된다.
<꿀벌 대소동>은 다른 종의 영역을 침범하는 법정 스캔들이란 발상을 통해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고찰하려는 공익적 성격의 애니메이션이다. 인간들이 벌꿀을 생산하기 위해 꿀벌들의 노동을 착취한다는 사실에 분개한 어린 꿀벌의 법정 소송이 이뤄진다는 황당한 설정은 대소동이란 단어로 구체화된다. <꿀벌 대소동>은 자아를 찾아 날아가고자 하는 어린 꿀벌의 성장 드라마이자 자연을 유린하는 현대인들을 각성하고자 하는 메신져다. 하지만 <꿀벌 대소동>은 창의력에 비해 구성력이 부족하다.
구체적인 이미지로 구현된 꿀벌의 세계는 생각의 전환을 통한 상상력을 과시한다. 인간의 생활을 답습해 꿀벌식으로 개조한 방식은 독창적이진 않아도 기발해 보인다. 머리, 가슴, 배라는 곤충의 신체 구조에 인간의 외모를 닮은 얼굴의 양식이 부조화처럼 느껴지지 않는 건 인간의 라이프 스타일을 복제해 붙여 넣은 꿀벌의 삶이 이미 인위적인 까닭이다. 하지만 <꿀벌 대소동>은 생태계의 구조적 의인화뿐만 아니라 인간의 사고를 꿀벌의 사고로 위장하는 우를 범했다. <꿀벌 대소동>은 자연을 유린하는 인간의 행위를 꿀벌의 시선으로 고발한다는 피해자의 목소리다. 하지만 그 피해자의 목소리도 다분히 인간의 사고 방식에 갇혀 있다. 꿀벌에게 그들의 생산 라인의 주도권을 넘긴 뒤, 그들의 나태함이 빚어내는 생태계 위기를 배열함으로써 꿀벌의 종속적 노동은 권리가 아닌 의무임을 각인시키는 태도는 어떤 면에서 불순하다. 지독한 인간 중심적인 사고 방식을 꿀벌의 목소리로 들어야 한다는 점만큼 끔찍한 것도 없다. 결국 그 소동 끝에 남는 건 꿀벌의 메커니즘도 자본주의의 물결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어리석은 인간주의적 사고일 뿐이다.
물론 애니메이션다운 기발한 착상은 평가될만하지만 그로부터 파생되는 사고는 지독하게 편협하고 어리석다. 이는 마치 도식적인 공익 캠페인처럼 느껴질 뿐이며 귀여운 꿀벌을 앞세운 영화적 착취로 느껴진다. 물론 그 이전에 안일한 설정과 나태한 구성으로 일관하는 이야기의 느슨함이야말로 <꿀벌 대소동>의 지독한 착오일 것이다. 물론 캐릭터의 발랄함과 대사의 묘미는 순간순간마다 톡톡 튀는 재미를 부여하지만 산만하고 무색한 대소동에 불과한 이야기의 난관을 극복하기엔 힘에 부친다. 그나마 88분이라는 러닝 타임은 일말의 위안이 된다. 또한 유재석의 더빙 연기는 가히 발군이며 영화와 별개로 묘한 재미를 부여한다.
2007년 12월 18일 화요일 | 글: 민용준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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