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방식의 상영된 두 번의 관람 결과, 진보한 영상물의 혁신적 결과가 더욱 피부적으로 다가오는 건 3D 입체 상영임에 틀림없었다. 물론 일반 상영관에서도 실사의 장벽을 넘어선 영상 기술의 성과를 뚜렷이 느낄 수 있었지만 그보다도 영화의 기술적 성취를 더욱 완벽히 느끼려면 전자가 더욱 큰 효과를 준다는 점은 명백했다. 사실 그래픽을 통한 풍경과 사물의 실사화는 수많은 블록버스터 영화들의 거대 자본이 구현한 CGI로 이미 성취한 것이라 놀랍지 않다. 하지만 현실의 풍경을 스크린에 거울처럼 담아내는 CG의 인공적 성과조차 미치지 못한 미지의 영역은 인간 본인에게 있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의 눈이 그 대상이다. 이는 동시에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이 전작 <폴라 익스프레스>를 통해 뼈저리게 느꼈던 바이기도 했다. 인간의 디테일한 몸동작과 근육의 자잘한 움직임까지 포착한 퍼포먼스 캡쳐(performance capture) 기술과 CG를 통한 피부 재생으로 살아있는 인간의 형태와 동작을 구현하는 것에 성공했지만 인간의 눈에 담긴 깊이까진 살리지 못했던 <폴라 익스프레스>는 ‘죽은 눈의 좀비’라는 비아냥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베오울프>는 그것이 감독의 아집처럼 느껴질지라도 전자에 비해 일취월장한 기술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완벽하다고 말할 수 없지만 확실히 인간의 눈에 감정이 구현된다는 점은 큰 성과로 인정할만하다. 물론 몇몇 캐릭터의 어색함이 다른 캐릭터에 비해 뚜렷하게 드러나기도 하고-운퍼스(존 말코비치) 같은 캐릭터는 가끔씩 좀비처럼 느껴진다.- 빠르고 역동적인 동작에 비해 느리고 섬세한 동작에서 기계적인 느낌의 어색함이 드러나기도 하지만 전체적인 완성도에서 새로운 영상의 진화는 확실히 어떤 성과를 드러내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일반 시사회 상영 후, 애니메이션인지 실사인지를 논하는 관객들이 종종 눈에 띄는 모습은 그런 사실을 방증하는 것만 같았다.
확실히 <베오울프>는 영상적 성과를 찬양할만한 과업이지만 그에 대한 언급은 이 정도로 멈추겠다. 사실 영화를 두 번에 걸쳐 본 건 국내에 몇 안 되는 아이맥스 입체 상영관의 공급 부족으로 <베오울프>의 수요를 원하는 대부분의 관객이 동참하게 될 일반 상영 방식의 느낌을 체험하고 싶었던 탓도 있으나 <베오울프>의 이야기에 담긴 특별한 관점에 매력을 느꼈던 까닭도 있다. 영웅의 묘사 방식부터 시대에 대한 어떤 관점까지. <베오울프>가 영웅을 스크린에 주조하는 방식만큼이나 영웅을 이야기하는 관점 또한 흥미로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베오울프>는 간단히 정리하자면 영웅의 비장한 일대기를 다룬 전형적인 서사로 읽힐 가능성이 크다. 괴물을 물리치는 헤라클레스 같은 영웅이 훗날, 왕이 되어 다시 한번 거대한 용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장렬히 전사한다는 전형적인 영웅 서사. 하지만 <베오울프>를 이처럼 간명하게 정리하기엔 배후적 시선의 욕망이 버겁다. <베오울프>는 기원전이 아닌, 그러니까 예수의 이름이 언급되는 기원후의 서사다. 시작부터 예수라는 이름이 언급되고, 구체적으로 중반 이후에는 로마의 새로운 신 예수에게 구원을 기도한다는 문장까지 언급된다. <베오울프>의 시대는 인간 중심에서 신 중심으로, 헬레니즘에서 헤브라이즘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징조들이 드러나는 시기다. 이는 다시 말해 제우스의 번개가 야훼의 십자가로 변질되어가는 혹은 전환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또한 <베오울프>의 인물들은 스스로를 소개할 때 자신의 선친을 먼저 앞세운다. –‘에지쏘우’의 아들 ‘베오울프’, ‘에클라프’의 아들 ‘운퍼스’- 이는 선친의 족보를 드러냄으로써 자신의 혈통을 과시하거나 그 신화적 연개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욕망에 가깝다. 결국 영웅 신화적 혈통의 계승을 과시하는 것이다.
베오울프(레이 윈스톤)는 헤라클레스 같은 괴력의 소유자이자 전설로서 확인되는 그 시대에 현존했을, 혹은 현존했다는 믿음을 얻었을 영웅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성경의 유일신 이전에 그 자리를 대신했을 인간 신화였을 것이다. 예수의 존재, 즉 십자가의 확대는 인간 신화에 대한 반역의 기운이다. 이는 인간의 존재감에 대한 위기이자 동시에 영웅 서사의 종말을 예고하는 일종의 신호처럼 느껴진다. <베오울프>는 그 영웅 서사의 명맥을 이을 수 없다는 어떤 불안감의 징조처럼 느껴진다. 용을 물리치고 평화를 찾았다는 흐로스가(안소니 홉킨스)는 대를 이을 자식이 없다. 또한 후에 그를 괴롭히던 괴물 그렌텔(크리스핀 헬리언 글로버)을 물리치고 그 뒤를 잇는 베오울프 역시 대를 이을 자식을 낳지 못한다. 이는 결국 왕가의 혈통이 끊김을 뜻한다. <베오울프>는 이를 저주라고 명명한다. 바다는 내 어머니라고 말하는 베오울프는 바다를 숭상하는, 다시 말해서 자연을 숭배하는 태초의 인간상에 가까운 인물이다. 동시에 그는 바다를 자신의 어머니라고 말하는 자연 신화의 화신이다. 결국 그 영웅의 죽음은 인간 서사의 종말이다. 늙은 베오울프는 자신에게 세상이 경배하는 영웅이라고 전하는 위그라프(브랜단 글리슨)에게 영웅의 시대는 갔다고 답한다. 또한 <베오울프>는 인간의 탈을 쓴 괴물의 본성이 왕의 자질이라고 말한다. <베오울프>의 왕직은 혈연으로 엮이지 않아도 능력으로 성취할 수 있는 시절이다. 이는 곧 영웅의 면모를 갖춘 자가 왕이 될 수 있다는 것, 즉 왕의 권위가 세습되는 것이 아닌 양도되는 사회이며 영웅적 자질이 대우받는 시대였음을 의미한다.
물의 마녀(안젤리나 졸리)와 살을 섞은 이들은 자신의 대를 이을 자식을 얻지 못한다. 그녀의 저주는 왕의 욕망, 즉 자신의 대를 잇고자 하는 욕망을 거세해버리는 것에 있다. 동시에 그 욕망은 저주받은 후손의 형태로 등장한다. –‘흐로스가’의 성기가 없는 괴물 ‘그렌텔’- 물론 영웅 베오울프의 후손은 그 괴물같은 DNA를 유전받아 거대한 황금용으로 구현된다. 하지만 이는 결국 자신의 대를 이을 후손이 아닌 처단해야 할 적으로 대치된다. 결국 자신의 손으로 생식의 능력을 거세하는 영웅의 욕망은 혈연에 집착하는 세습의 형태를 은유한다. 영웅의 서사는 양도가 아닌 혈연의 방식에서 사멸되어갔다. <베오울프>는 그것을 ‘아버지의 죄’라고 말한다. 권력에 심취한 영웅의 세습적 욕망을 덧씌웠지만 영웅의 혈통이 발현되지 못한 후손들은 그렌텔의 비명처럼 처절한 비극에 직면했을 것이다. 흐로스가가 자신의 저주받은 후손의 죽음을 확인한 후, 자신의 왕권을 베오울프에게 넘기고 자살하는 것도 이런 굴레의 허무함을 일찍 깨닫게 된 까닭일 것이다. 결국 <베오울프>는 인간 영웅 시대의 종말을 담은 서사시다.
<베오울프>는 영웅 서사의 전형성에 고도의 은유를 담아 새로운 양식의 고전을 완성했다. 새로운 영상 기술력이 빚어낸 혁신의 그릇은 진보된 영웅 서사적 관점을 채워낸다. 3D의 갑주를 걸친 고전 영웅 서사, 첨단 영상 기술을 통해 복원된 엔티크(antique)적 유물은 내외적으로 새로운 세기의 꿈틀거리는 욕망을 가득 담아낸 흥미로운 성과다. 동시에 이는 언젠가 인간의 자리를 대체할 디지털 배우들의 미래상에 대한 얼리 어댑터(early adopter)가 된 것만 같아서 한편으로 섬뜩한 기분을 거머쥐게 만든다.
2007년 11월 14일 수요일 | 글: 민용준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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