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진호 감독은 그에 반해 현실의 재현에 주안점을 두는 것만 같다. 그의 영화들은 대사로서 혹은 인물로서 항상 현실을 구체화시킨다. 그래서 극단적인 감정적 과잉을 연출하지 않고서도, 마치 체득한 감정을 직접 경험하게 하듯 영화 속 인물들의 감정을 관객들도 고스란히 짊어지게 만든다. 그것은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감정의 지정학적 환경이 일상의 자연스러움을 잘 살리고 있는 덕분이다. 무덤덤한 카메라의 시선은 디테일한 현실의 재현성을 통해 생동감을 부여 받는다. 그와 동시에 관객과의 어떤 거리감, 마치 현실과 영화 사이의 간극마저도 일거에 해방된다.
<행복>은 역시나 허진호 감독의 손길이 잘 묻어나는 영화다. 물론 그것은 단지 사랑을 소재로 했다는 것 때문일지도 모른다. 혹은 연기적 열연 이상의 캐릭터 자체에 다다르는 듯한 배우들의 연기력 덕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 캐릭터들은 허진호 감독이 연출한 환경의 중력 안에 있다. 특히나 지정학적 위치의 변화와 함께 도모되는 인물의 정서는 환경에 따라 변화하기 쉬운 족속인 인간의 나약한 본성을 고스란히 머금고 있다. 알코올과 니코틴에 찌든 영수(황정민)의 육체가 도시를 떠나 시골의 요양원에서 치유될 때, 그 순간에 사랑이 찾아온다. <행복>은 어떤 이들의 시린 사랑이야기이지만 영화의 배경은 단지 사랑을 묘사하기 위한 어떤 구조물의 기능성에 국한되지 않고 인생에 대한 성찰을 안고 간다. ‘몸에 좋은 건 재미가 없지’ 등의 대사는 인물의 내면 심리를 통한 극적인 정서를 대변함과 동시에 그 상황 자체만으로 쥐어지는 간접적인 경험담을 선사한다.
사실 <행복>은 허진호 감독의 이례적인 전작 <외출>을 제외한 기존 작품들과 동일한 화법의 작품이다. 그런 점에서 <행복>은 허진호 감독의 동어반복적인 관습 안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어휘력의 깊이는 더욱 세심해졌다. <8월의 크리스마스>와 <봄날은 간다>를 통해 이별의 슬픔을 풋풋한 추억으로 환원시키던 허진호 감독은 <외출>의 뜨거웠던 한차례 외도 뒤에 가을 낙엽처럼 쓸쓸한 <행복>으로 돌아왔다. <행복>은 허진호 감독의 가을처럼 보인다. <행복>은 어느 계절에 무르익었던 감정이 노쇠하는 순간을, 그 노쇠한 감정이 나락으로 떨어져 짓밟히는 순간을 차분하게 응시한다. 그 시선은 잔인할 정도로 세밀하게 슬픔 이상의 아픔을 객석으로 전이한다. 또한 인물의 내면을 입체적으로 드러내는 배우들의 연기는 열연 이상의 내공을 보여준다.
<행복>은 너무나도 행복했기에 현실의 불행을 사무치게 느끼게 하는 시절을 망각한 남자의 절실한 사연이다. 시공간에 대한 생생한 그리움은 <행복>에 대한 반어적 정서를 형성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왜 <행복>이라 불려야 하는가에 대한 수긍을 부른다. 흰 눈이 가득한 배경 속의 쓸쓸한 정적 너머로 엔딩 크레딧을 올린 <행복>너머로 언젠가 찾아올 허진호 감독의 겨울은 과연 어떤 동어반복이 될지, 혹은 어떤 외도를 보여줄 것인지 사뭇 궁금해진다.
2007년 9월 18일 화요일 | 글: 민용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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