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살면서 가장 상처받는 이유 중 하나가 배신이 아닐까 한다. [넘버 3]에서 송강호님이 그렇게 강조한 "배신" 말이다. 영화를 볼 때도 유난히 기대하게 되는 영화가 있는데 그런 영화가 배신을 때리면 요즘 유행하는 말로 "담가버리고" 싶어진다. 최근의 배신자로는 <기프트>의 샘 레이미가 있다. [인디안 썸머]도 그렇게 배신을 때린 영화다.
사실 이 영화에 어떤 새로움을 기대한 건 절대 아니다. "인디안 썸머"라는 현상을 차용한 아이디어는 새롭지만, 기대하는 건 익숙한 멜로의 조합, 하지만 능숙하고 세련되게 만들어서 사람 마음을 울리는 영화를 기대했다. [인디안 썸머]는 제작 당시에 한국영화 중에서 단연 기대작이었다. 이미연([물고기자리]로 연기력 인정 받고, 뮤직비디오, <이미연의 연가> 등을 통해 요즘 가장 뜨는 여배우)과 박신양(본인이 그렇게 불리는 걸 좋아하지는 않겠지만 멜로 전문배우)이 나오는 최루성 멜로영화. 이 정도면 기대하는 걸 단 한가지 아닐까 한다.
영화 내내 박신양과 이미연은 줄기차게 울어대지만, 관객은 아무런 감정의 울림을 받지 못한다. 울리지 못하는 이유? 그건 역설적이게도 영화가 울리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자신들끼리만 도취돼서 슬퍼하기 때문이다. 마치 맛없는 반찬으로 저녁을 차려놓고 "맛있지" 하며 귀찮게 묻는 새색시처럼. 눈에 콩깍지가 쓰인 새신랑이 아닌 이상 맛있을 리가 없다.
이미연이 무죄선고를 받기 전까지는 그런 대로 볼 만하다. 전형적이지만 초반 에피소드로 박신양의 성격을 보여주고 그런 인물이 정의감과 자신도 규정짓지 못하는 애틋함으로 변론에 열중하는 과정, 그리고 무엇보다 푸른 죄수복을 입고 허허한 표정을 짓는 이미연의 클로즈업, 그녀가 감추는 비밀에 대한 궁금증....... 그리고 이미연이 박신양에게 조금씩 맘을 여는 과정. 세심하다고는 못하겠지만 무난하게 차린 밥상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 영화는 결정적 실수를 저지른다. 이미연을 감옥에서 꺼내면 안 되는 것이었다. 이 영화가 다른 멜로와 다르게 방점을 찍은 요소가 법정을 무대로 한 안타까운 사랑이야기를 펼치는 것인데 이미연이 풀려나면서 여느 멜로영화의 밀월여행과 다름없는 이야기를 보여주고 만다. 사랑의 감정에 빠진 두 사람의 심리를 설명하기 위해서 함께 하는 시간을 설정할 수 밖에 없기는 했을 것이다. 짧은 여행을 통해 "인디안 썸머"를 경험하니까. 하지만 아무리 좋게 봐 줄려고 해도 작위적인 게 눈에 너무 띈다. 그리고 누가 봐도 다시 잡혀들어갈 거라는 게 뻔하다. 프롤로그의 <가을동화> 같은 장면들이 왜 나오나 했는데 이 대목을 위한 대비였다. 은서와 준서가 있을 거 같은 폐교와 낙엽길, 그리고 왠 빈집에서 보내는 하룻밤
그냥 그런 멜로 영화라면 참겠다. 하지만, 법정을 무대로 긴박한 상황에서 피어나는 사랑, 진범이 누군가 하는 미스테리를 큰 축으로 삼으려는 시도를 한 제작의도를 생각하면, 생뚱맞은 장면들이다. 덕분에 무죄로 풀려나기 전까지 법정장면과 "인디안썸머" 여행장면, 그리고 후반의 법정장면이 각각 톤이 달라 일관성이 없다. 초반은 무죄추정이라는 법정원리에 의한 법정영화, 중간은 소녀취향의 로맨스(이미연은 푸른 죄수복을 입을 때가 훨씬 낫다. 갑자기 수줍은 소녀가 돼버리는 이미연이라니), 후반부는 눈물 짜려 노력하는 멜로영화. 유치한 건 이해한다고 해도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일으키지 못하는 건 이런 갈팡질팡 때문이 아닐까 한다. 여러 가지 요소를 끌어담아 관객을 울리려고 한 노력이 전혀 어울리지 않아 보는 이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일관성을 가지고 관객의 감정을 천천히 끌어당겨 결국은 동일시하게 만드는 멜로의 전략에서 실패했다.
여행 이후는 더 가관이다. "인디안 썸머"를 겪어 사랑에 빠졌으니 이젠 어떻게 시나리오를 써도 다 설득력이 있을 거라고 믿었나 보다. 정의감 빼면 시체였던 박신양은 갑자기 이미연의 일본 밀입국을 시도하고 폭주족을 사주하여 경찰을 따돌린다(사족이지만 이 영화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건 폭주족 최상학뿐이다. 음) 이게 무슨 시다바리 영화인가? 차라리 하와이로 보내버리지 그래? 왜 우리나라 영화에서는 변호사고 깡패고 항상 위급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일본 밀입국을 그렇게도 시도하는지 모르겠다. 정의롭지 않게 해결하려면 그리고 법정을 무대로 한다면 법의 허점을 파고들어 구해내려고 했어야지 않나 싶다.
그리고 히든카드로 준비한 것 같은 사건의 진실이 너무나도 쉽게, 어이없이 이미연의 입에서 그대로 튀어나온다. 적어도 그 진실이 세심하게 준비한 반찬이라면 영화의 클라이막스, 특히 법정에서 이미연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기로의 순간에 극적으로 제시되리라 믿었던 나로서는 제대로 배신당한 기분이 들었다. 이미연의 입에서 술술 흘러나오는 사건의 진실은 익히 예상가능해서 충격적이지도 않고 동정의 기분도 들지 않았다. 이런 결정적인 배신 때문에 그 이후는 억지 눈물파티로 일관하고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한다. 그저 "지 잘난 맛에 사는 변호사"와 "폭력남편에게 시달린 불쌍한 여자" 이야기, 즉 "남"의 얘기를 멀뚱멀뚱 볼 뿐이다.
[인디안썸머]는 "안타까움"의 영화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 피어나는 사랑. 그 사랑을 잡을 수도 없고 놓치기도 아까운 안타까움에 관한 영화다. 그리고 그런 안타까움은 감옥의 접견실, 그리고 법정이라는 한정의 공간에서 더 빛을 발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안타까움은 마지막 법정에서 피고대기실의 흔들리는 문 사이로 서로를 바라볼 때 뿐이다.
마지막으로 [인디안썸머]로 인해 이미연과 박신양이 욕을 먹지는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영화가 시원찮은데 배우는 잘했다고 칭찬 받는 게 과연 배우 자신에게 마냥 좋은 일인지 묻고 싶다. 마치 박찬호가 등판해서 팀은 지고 찬호만 잘 던졌다고 좋아하는 것처럼 마냥 좋아할 일은 아니다. 이미연은 자신의 연기력만 돋보이는 영화가 아니라 연기력이 영화에 보탬이 되는 작품을 찾아야 할 것이고 박신양은 제대로 된 멜로 영화를 고르지도 못하면서 왜 스스로 멜로 전문배우가 되려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