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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그녀 자신의 운명에 당당히 맞섰는가?
베로니카:사랑의 전설 | 2001년 4월 13일 금요일 | 모니터 2기 기자 - 강영훈 이메일

스크린에 빛이 명멸하면 그것을 보는 우리들의 의식도 깜박인다. 그 명멸과 깜박거림의 주고 받음이 얼마나 조응을 이루는가가 그 영화가 보는 이들의 뇌리뿐만 아니라 가슴까지 다다라 오래도록 남을 수 있는가가 영화의 성패를 좌우하는 요인이 아닐까. 16세기 베니스를 무대로 실존 인물인 베로니카의 생애를 담은 영화 [베로니카-사랑의 전설]은 기본 설정부터 우리에게 먼 과거의 이야기라는 점과 베니스라는 동떨어진 공간이라는 핸디캡을 안고 출발한다.

신분의 차이 때문에 사랑하는 마르코(루퍼스 스웰)와의 사랑을 이루지 못하는 베로니카(캐서린 맥코마크)는 그 자신이 그런 길을 걸었던 어머니가 권하는 고급 창녀의 길을 선택한다. 한 사람의 사랑을 얻기보다는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다는 명목하에. 그런데 그녀의 어머니가 물려주는 고급 창녀가 되는 길이라곤 고작해야 남자를 사로잡는 법 정도일 뿐이다. 왜 그 때 불현 듯 그 생각이 났던 걸까? 1930년대 시인 백석과 열렬한 사랑을 했던 기생 자야 여사의 자서전 생각 말이다. 그 첫머리, 좋은 기생이 되기 위해 받아야 했던 그 힘든 교육들에 대한 소개. 그 노략에 비한다면 베로니카는 창녀로서 타고난 인간이라는 것일까? 그 미모와 그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타고난 시재(詩材). 하긴 그 정도 인물이니 영화화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지만 영 찜찜한 기분은 그 순간부터 가실 줄을 몰랐다.

그래서였는지 자신 스스로를 자유케 하리라던 기대와는 달리 그녀가 여전히 마르코에 대한 사랑을 버리지 못했으며, 그에게서 달아나려 몸부림칠 수도 더욱 마르코에 대한 사랑의 올가미에 얽혀 드는 것을 볼 때 그녀에게 주어진 가혹한 운명에 그닥 가슴 아프지 않았다. 차라리 현실의 관습의 벽에 도전하는, '잔다르크' 같은 여인상을 기대했다면, 내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일까. 하지만 그것이 이 영화의 홍보 문구인 '사랑의 자유를 선택한 여인'의 이야기라는 카피에는 더 적절한 모습일 거라는 데는 이견의 여지가 없을 듯하다. 그렇듯 자신을 옭아맨 운명의 실타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쩔쩔 매는 그녀에게 터키와의 전쟁 때문에 자신의 몸으로 프랑스 왕의 협조를 얻어냄으로써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시대적 요구에 응당 응하는 것은 이견의 여지가 없는 당연한 선택인 것이다. 영화 속에서 보여지는 연약한(?) 여인의 모습으로서는 당연할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전쟁과 더불어 페스트의 열병이 나라을 휩쓸고 그 때문에 그녀를 비롯한 창녀들이 마녀 재판에 회부되는 위기의 순간. 분명 관객의 공감과, 더 나아가서는 감동까지 자아내려고 했음이 분명한 이 에피소드에서 갑자기 당당해진 그녀의 모습은 당혹스럽기 짝이 없다. 거기다 '누가 이 여인에게 돌을 던지랴'는 식의 뻔한 결말 앞에서 감동이 아니라 망연자실해 질 수밖에 없다. 왜 진작에 그렇게 자신의 운명에, 시대에 당당히 맞서지 못했는지, 그래서 감동의 박수가 아니라 측은함의 냉소를 보내는 나 자신과 만난다.

'사랑의 전설'이라는 거창한 제목보다는 차라리 원제인 '그녀 자신의 운명(A Destiny of Her Own)'이 어울릴 만큼 [베로니카-사랑의 전설]은 시대와 운명에 휘둘리는 베로니카의 삶을 보여 준다. 그건 결국 이 영화가 외국의 시대극이라는 핸디캡을 스토리 구조로 메꾸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보는 내내 그 스크린의 내용과 보는 사람의 의식이 서로 평행선을 긋게 되는 것이다. 도무지 합치될 수 없는 그 이질감은 감동은커녕 동감조차도 얻지 못하게 한다. 제목처럼 '사랑의 전설'로 남는 것이 아니라 그냥 스쳐가는 바람처럼 우리 곁을 스쳐간 바람 같은 영화라고 한다면 한 동양인의 옹졸한 생각에서 나온 편협한 평일까?

2 )
ejin4rang
자신의 운명이 맞서자   
2008-10-17 08:45
rudesunny
기대됩니다~   
2008-01-14 14:4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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