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분의 차이 때문에 사랑하는 마르코(루퍼스 스웰)와의 사랑을 이루지 못하는 베로니카(캐서린 맥코마크)는 그 자신이 그런 길을 걸었던 어머니가 권하는 고급 창녀의 길을 선택한다. 한 사람의 사랑을 얻기보다는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다는 명목하에. 그런데 그녀의 어머니가 물려주는 고급 창녀가 되는 길이라곤 고작해야 남자를 사로잡는 법 정도일 뿐이다. 왜 그 때 불현 듯 그 생각이 났던 걸까? 1930년대 시인 백석과 열렬한 사랑을 했던 기생 자야 여사의 자서전 생각 말이다. 그 첫머리, 좋은 기생이 되기 위해 받아야 했던 그 힘든 교육들에 대한 소개. 그 노략에 비한다면 베로니카는 창녀로서 타고난 인간이라는 것일까? 그 미모와 그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타고난 시재(詩材). 하긴 그 정도 인물이니 영화화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지만 영 찜찜한 기분은 그 순간부터 가실 줄을 몰랐다.
그리고, 전쟁과 더불어 페스트의 열병이 나라을 휩쓸고 그 때문에 그녀를 비롯한 창녀들이 마녀 재판에 회부되는 위기의 순간. 분명 관객의 공감과, 더 나아가서는 감동까지 자아내려고 했음이 분명한 이 에피소드에서 갑자기 당당해진 그녀의 모습은 당혹스럽기 짝이 없다. 거기다 '누가 이 여인에게 돌을 던지랴'는 식의 뻔한 결말 앞에서 감동이 아니라 망연자실해 질 수밖에 없다. 왜 진작에 그렇게 자신의 운명에, 시대에 당당히 맞서지 못했는지, 그래서 감동의 박수가 아니라 측은함의 냉소를 보내는 나 자신과 만난다.
'사랑의 전설'이라는 거창한 제목보다는 차라리 원제인 '그녀 자신의 운명(A Destiny of Her Own)'이 어울릴 만큼 [베로니카-사랑의 전설]은 시대와 운명에 휘둘리는 베로니카의 삶을 보여 준다. 그건 결국 이 영화가 외국의 시대극이라는 핸디캡을 스토리 구조로 메꾸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보는 내내 그 스크린의 내용과 보는 사람의 의식이 서로 평행선을 긋게 되는 것이다. 도무지 합치될 수 없는 그 이질감은 감동은커녕 동감조차도 얻지 못하게 한다. 제목처럼 '사랑의 전설'로 남는 것이 아니라 그냥 스쳐가는 바람처럼 우리 곁을 스쳐간 바람 같은 영화라고 한다면 한 동양인의 옹졸한 생각에서 나온 편협한 평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