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영화가 있었다. 멀티플렉스의 반을 넘게 점유하고 있는 우리 영화와 나머지를 차지 하고 있는 헐리우드 영화에 식상해 조금 더 새로운 것이 보고 싶을 때, 영화제 등을 기웃거렸지만 지나친 ‘새로움’을 감당하기엔 수면 부족일 때, 떨어지는 헬멧들과 플라스틱으로 이루어진 산 같은 독특한 컷에 왠지 끌린 영화. 그리고 영화가 끝나고 흐르는 음악을 듣고 있다가 갑자기 ‘태국’이라는 나라가 궁금해진 영화.
CF 회사를 다니고 있으며 때문에 데뷔작 <검은 호랑이의 눈물>에서 두 번째 작품인 <시티즌 독>까지 걸린 시간이 4년, 다음 영화는 또 4년은 흘러야 완성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위시트 사사나티앙 감독이 만든 <시티즌 독>은 지난 제10회 부산국제영화제와 제2회 CJ아시아인디영화제에서 이미 소개된바 있으며 당시 전회 매진을 기록한 입소문의 위력을 가진 영화다.
도시인에 대한 은유적 제목이 주는 정치성이 조금 거리감 있게 느껴질 만큼 <시티즌 독>은, 현실성을 망각한 색감을 무기로 시작부터 그림책 같은 농촌 풍경, 방콕으로 가면 꼬리가 난다는 할머니 말씀, 그리고 흐르는 사랑 노래로 한편의 우화 같은 이야기를 펼쳐 놓는다.
분명 현재이고 이름도 낯설지 않은 공간, 동시대의 방콕을 주무대로 하고 있건만 <시티즌 독>이 보여주는 것은 태국어 대사만큼이나 생경한 공간이다.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도시, 그리고 그곳에 막 도착한 꿈이 없는, 그래서 꼬리도 없고 존재감도 없는 청년 팟. 그가 첫 직장인 통조림 공장의 채플린적이고 무성 영화 같은 그 장면에서 손가락이 잘리는 순간, 다시 한번 제목에서 느꼈던 무게감을 감지, 낮게 한숨을 쉬려던 찰나, 팟은 통조림에 들어간 손가락을 찾아 가게를 누비고 톡톡 두드리는 버릇을 잘려서도 버리지 못했던 그의 손가락이 다시 그의 손에 붙는 순간, <시티즌 독>의 독특한 판타지의 공간이 열린다..
사람에게는 많은 이야기가 있다. <시티즌 독>은 하얀 책을 내용을 알게 되면 꿈이 이루어질 거라고 믿는 진과 그녀를 사랑하게 된 팟의 사랑이야기지만 팟과 잘린 손가락이 바뀐 인연으로 친구가 된 요드, 나이를 알 수 없는 맴과 그녀의 골초 곰인형 통차이, 도마뱀으로 환생한 할머니 등 동시에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다양한 판타지를 펼치는 시끌벅적한 도시의 일상을 담고 있다. 내세울 것 없는 소시민들이 펼치는 숨겨진 이야기들은 낯설지 않은 공간인 도시를, 특별한 공간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시종일관 유지되는 이 상식적이지 않은 전개는 다행히도 주인공 팟이 갖고 있는 순수함과 우직함으로 이야기의 사실성과의 균형을 조성한다. 비록 담배를 안 사왔다고 통차이가 불평은 할지라도 말이다.
경비원 팟과 청소부 진이 꾸는 꿈은 화려하고 멋진 것은 아니다. 진의 하얀 책의 실체도, 죽어서도 생업에 종사하고 있는 오토바이 운전사도, 재미있는 동화는 소시민에 대한 은유를 품고 있지만 <시티즌 독>을 보고 있다 보면 풍자 보다는 애정을 발견하고 싶어진다. 어쩌겠는가. 파란 옷을 입은 진에게 반한 팟의 눈에는 강아지들까지 그 파란 옷을 입고 있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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