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로’의 검은 복면은 악과 선을 색깔로만 구분하는 경계점을 모호하게 만들었다. 고정된 영웅의 모습과는 반대로 이미지를 조합해나가는 ‘조로’ 캐릭터의 이런 성격은 1세기에 가까운 세월동안 ‘조로’를 디지털 시대에 어울리는 아날로그 영웅으로, 자신을 변주하고 패러디하게 만들어 현재에 도착했다.
7년 전, <마스크 오브 조로>는 구시대와의 안녕을 고하면서 스스로 새로운 버전 업을 이룩한 새로운 조로의 탄생기다. 때문에 7년이나 ‘안토니오 반데라스’가 연기한 ‘조로’가 소식을 끊었을 때도 우린 그를 기다리거나 잊지 않았다. ‘조로’는 악을 응징하는 민초들의 영웅으로 남기보다, 오랜 세월 우리의 성장과 정서를 자극한 일종의 역할모델이다. 검은 복면을 벗으면 빈틈도 더러 있는 유쾌한 남성으로 돌아오는 조로의 인간적 양면성은 시간의 나이테가 깊어질수록, 마스크 이면에 좀 더 풍성한 이야기 꺼리가 있음을 상상하게 만든다.
2005년 약간은 유치함이 돋보이는 제목으로 조로가 돌아왔다. <레전드 오브 조로>는 전작에서 주연을 맡은 ‘안토니오 반데라스’와 ‘캐서린 제타 존스’가 고스란히 출연하고 7년 전 영화 속 시간에서 10년이 지난 시점에서부터 새로운 ‘조로’의 얘기를 한보따리 풀어놓는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주인공 조로를 연기한 안토니오 반데라스의 그 특유의 느끼함이 예전만 못함을 먼저 인지해주길 바란다. 그래야 극의 흐름에 쉽게 몰입할 수 있다.
엘레나(캐서린 제타 존스)와 결혼한 조로, 똘망똘망한 아들까지 얻어 나름대로 탄탄한 가정을 꾸려가며 여전히 ‘조로’생활을 하고 있지만, 캘리포니아 주가 연방정부에 귀속되려는 세상의 변화 속에서 자신의 위치가 조금씩 흔들림을 감지한다. 캘리포니아주가 독립을 획득하면 조로 생활도 청산하겠다는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겐 조로 이외의 삶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조로’는, 분신 그 이상의 삶의 목적이 돼버린 상태다.
21세기 ‘조로’는 자신의 사명감을 신념과 이상에서 얻기보다 가족의 안위와 생계를 보장하는 게 우선인 ‘가족주의’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획득해야만 한다. 약한 자들의 영웅으로 고고하게 살수만 없도록 조로를 바라보는 세상의 잣대가 변했기에 그의 이런 변신의 시도는 일견 당연해 보인다. 절도 있는 검 솜씨와 악당의 허를 찌르는 익사이팅한 액션이 풍성해져도, ‘좋은’ 아버지가 되려는 조로의 애처로운 이중생활은 그 옛날의 조로가 아님을 말해준다.
자신을 스스로 변주하는 게 조로의 특징이긴 하지만 말을 타고 황야를 마주하던 낭만적 정서가 사라진 <레전드 오브 조로>의 조로에게 익숙해지려면 그만큼 시간이 걸릴 듯하다. 아내와 아들이 자신의 삶을 인정해주면서 조로는 언제까지나 이어질 것임을 보장받는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를 선망과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똘똘한 아들의 존재에서 새로운 ‘조로’를 엿보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