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부모님들은 나는 상상도 하지 못하는 보리고개라는 궁핍한 시기를 겪었고, 간식이라 불러도 될 사치스러운 먹거리가 아닌 것들을 주점부리로 하고 자라셨다. 그 시기에도 누군가는 미제 사탕과 초콜렛을 빨고, 생크림(난 생크림을 생크림 케잌이 나온 몇 년 전에 알았건만. 그 전에는 버터 크림이 그냥 크림의 전부인 줄 았았다.) 등을 만들어 먹었다는 것을 최근에서야 어떤 노부인의 추억담을 듣고 알았지만 일반적인 추억의 '그 때 그 시간' 속 모습들은 대체로 궁핍했다. 옷을 물려 입고, 꿰매 입고, 팔꿈치와 무릎은 덧 대어 입었다.
[천국의 아이들]에서도 우리들의 주인공들은 어른 신발도 아닌 아동용 신발을 사려해도 빚을 내야 하고, 그 이웃은 꿰매진 구두일지라도 줍게 되면 당연히 신어 버리는 형편에 있다. 동생 자라의 구두를 어이없게 잃어버린 오빠 알리는 9살이지만 아픈 엄마와 고생하는 아빠의 속을 상하게 할까 봐서 동생과 운동화를 같이 신는다. 그리고 9살이기에 혼날 것이 두려워 제발 이르지 말라고 울면서 동생에게 애원을 하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자라는 자신의 구두를 주워 신은 아이를 미행했지만 맹인 아버지와 사는 모습을 보고 차마 다가가 말하지 못한다. 그 아이는 나중에 우연히 자라가 흘린 샤프펜슬을 줍고, 무척 탐이 났지만 돌려준다.
알리는 속도가 붙어 버린 두 다리를 어떻게든 잘 움직여서 3등을 하려고 노력했지만 1등을 해버렸다. 1등도 2등도 아닌 3등을 하고자 질주하는 알리의 모습이 1등을 하려고 질주하는 아이들의 모습과 간발의 차이로 앞서고 뒤지고를 반복하는 장면은 느린 동작 이외에 어떤 효과음이나 인위적 효과가 들어가지 않는다. 우리는 알리의 목적이 순수했던 것처럼 충분히 극적으로 부풀려 질 수도 있었던 장면을 순수하게 바라보게 된다.
이렇게 [천국의 아이들]에 극도의 사실성 또는 가난에 사기까지 겹쳐지는 식의 정말 골치 아픈 현실은 없다. 주인공 가족이 겪는 가난과 삶의 애환이 사회와 이웃의 악의성으로 인한 피해가 아닌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너무 가슴 아프고 마음이 아파서 영화에 대한 느낌이 무거워 졌을 것이다. 그렇다고 앞서 말한 궁핍한 생활에 대한 낭만적 미화도 없다. 모두가 착하고, 죽을 만큼 힘들고 절망적인 상황은 아니기에, 언젠가는 그들에게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게 되었어요' 라고 끝맺는 동화의 마지막 같은 날이 올 것 같다.
마지막의 두 장면이 그러한 기대에 조금은 부응할 수 있게 한다. 밑창이 뚤린 헌 운동화로 마라톤을 하느라 퉁퉁 붓고, 물집 투성이가 된 발을 물 속에 담근다. 그리고 주홍빛 금붕어들이 알리의 발을 서서히 감싼다. 지금은 알리의 노력과 아픔을 미물인 물고기만이 감싸고 있지만 그것은 마치 자연의 선하고 위대한 섭리와 치유의 대상에 속하게 되는 작은 시작과 같다. 한편 아버지는 시장에서 푸짐하게 장을 보고, 그 짐들 속에는 두 남매의 새 신발이 찔러져 있었다.
지금 이란은 독재 체재에서 전환되어 이슬람 공화국 체제에 있다고 한다. 그것이 [천국의 아이들]에서 보여진 극심한 빈부 차를 좁혀 주고, 알리와 자라가 정말 세상을 천국처럼 느끼게 해줄 지는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