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예년보다 공포영화가 좀 더 일찍 관객을 찾아온 듯합니다. 5월 초에 개봉한 김대승 감독의 <혈의 누>는 한국 영화사상 가장 화끈한 고어씬을 선보이며 공포영화 팬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고, 임필성 감독의 <남극일기>는 그닥 만족스럽지 못한 흥행성적과 함께 이미 간판을 내렸지요.
나름의 관객층이 형성된 덕분에 이렇듯 계절에 관계없이 공포영화를 볼 수 있게 되었지만, 공포영화 시즌 하면 역시 여름입니다. 올 여름도 다양한 소재와 색깔로 무장한 4편의 한국 공포영화가 개봉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분홍신>, <여고괴담 4: 목소리>, <가발>, 그리고 <첼로-홍미주 일가 살인사건>이 그 라인업입니다.
공포영화는 특히 장르의 구속력이 강한 만큼, 올 여름 개봉하는 4편의 영화들이 기존의 공포영화들과 얼마나 차별화된 공포를 선사해 줄 것인가가 흥행의 관건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머리를 풀어 헤치고 두 눈에 힘 꽉 준 사다코의 자매들이 또 다시 스크린을 휘저으며 똑같은 타이밍에 똑같은 방식으로 놀래키려 한다면, 미안하지만 더 이상은 놀라 줄 자신이 없거든요.
때문에 ‘올 여름 한국 공포영화는 이전의 어떤 영화들에 뿌리를 두고 있는가 혹은 얼마나 다른 전략을 취하고 있는가’ 라는 점을 체크해 본다면, 그 흥행 가능성을 미리 점쳐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와 더불어 <샤이닝>이나 <데드 얼라이브>로 시작되는 ‘납량특집-필견 공포영화!’의 진부함을 넘어서, 덜 알려졌지만 충분히 볼만한 가치가 있는 공포영화들로 새로운 리스트를 작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쳐다보지 말아요, 무섭다니깐! - 지금 뒤돌아 보지마라 (1973, Don't Look Now)
니콜라스 로에그 감독의 영화 <지금 뒤돌아 보지마라>는 특이한 방식으로 공포감을 조성하는 케이스입니다. 영화를 통틀어 칼부림은 한 번 뿐이고 설명할 수 없는 심령현상이 일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대신 관객을 끊임없이 불안하게 만들며 영화 전편에 불길한 기운을 감돌게 하는 건 바로 '시선'입니다. 단역의 배우들이 주인공을 빤히 쳐다보며 의미없는 미소를 짓거나 불길하다는 듯이 고개를 돌려버리지요. 등장인물의 시선뿐만 아니라 뱃머리나 벽면을 장식한 눈동자 문양을 빌어 '응시'의 이미지를 강화합니다. 주인공들은 인지하지 못하는 그런 ‘시선’들의 나열은 사실 내러티브의 완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는 않습니다만, 영화에 불안감을 조성하는데 확실한 효과를 발휘합니다.
이처럼 <지금 뒤돌아 보지마라>의 공포는 '뭔가 어긋났다‘는 느낌에서 발생합니다. 조연배우들의 삐딱하고 심중을 알 수 없는 애매한 태도와 시선은, 우리가 영화에서 만나는 규격화된 연기나 촬영방식-배우들의 시선의 처리나 극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따라 할당되는 카메라의 촬영시간-에서 어긋나 있지요. 우리가 영화를 본다는 행위는 다분히 학습된 결과이며, 익숙한 영화 문법을 벗어난다면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몸짓이나 의미 없는 시선일지라도 큰 공포감을 조성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지금 뒤돌아 보지마라>는 효과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영화의 편집도 공포감을 확장하는데 큰 역할을 합니다. 실수로 넘어뜨린 물컵을 보고 갑자기 불안을 느껴 딸에게 달려가는 백스터(도날드 서덜랜드 분)와 물웅덩이에서 공놀이를 하는 딸아이를 평행편집으로 보여주는 장면과, 어두컴컴하고 미로같은 베니스의 뒷골목을 헤집으며 빨간두건 소녀를 쫓아가는 마지막 장면에서 그 기묘한 템포의 편집의 효과를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금 뒤돌아 보지마라>는 마지막 한 방을 노리는 영화입니다. 불길한 시선과 숨가쁜 편집 끝에 마침내 빨간두건 소녀를 따라잡은 백스터가 그녀를 돌려세웁니다. 그런데 그녀는...? 차마 그 정체를 말할 순 없지만, 그녀의 정체가 밝혀지는 장면은 TV에서 사다코가 기어나오는 장면만큼이나 무섭습니다!
성인 버전 <빨간 두건> - 늑대의 혈족 (1984, The Company Of Wolves)
닐 조단의 <늑대의 혈족>은 동화 <빨간 두건>과 늑대인간의 전설을 뒤섞어, 한 소녀의 육체적 성장, 그리고 그에 따른 감정의 혼란과 두려움을 환상적으로 그려냅니다. 이 영화의 성적 암시는 암시라고 말하기도 민망할 만큼 노골적이어서, 버섯이나 독사 같은 프로이트적 상징이 곳곳에 넘쳐납니다. 사실 늑대인간의 ‘변신’의 모티브를 성적 맥락에서 해석하는 영화는 이외에도 많습니다. 가령 <진저 스냅>에서는 초경과 함께 구체화된 신체적/감정적 변화가 점차 늑대인간으로 변하는 신체로 은유되지요. 그런 변화에 수반되는 불안과 공포를 <진저 스냅>은 무차별적인 살육과 왕성해진 성욕의 형태로 표출하지만, <늑대의 혈족>은 도덕적이고 심리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려 합니다.
<늑대의 혈족>은 원작 동화처럼 “낯선 사람과 말하지 마라, 정해진 길로만 가라”며 이제 막 여인이 되어가는 Rosaleen에게 유혹에 빠지지 말라고 충고합니다. 첫 장면에선 그 충고를 지키지 않아 늑대에게 죽임을 당한 언니의 시체가 등장하는 것은 일종의 경고겠지요. 하지만 소녀는 “이빨”을 숨기고 접근하는 남자(늑대인간)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어쩔 수 없이 매혹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렇다고 그 매혹이 자신의 욕망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향유하는 단계로 발전하는 것은 아니에요. 자신의 침실을 침범하는 늑대떼들에 비명을 지르는 Rosaleen에게, 자신의 욕망을 인정했던 간밤의 황홀한 꿈은 악몽으로 변질되고 맙니다.
이렇듯 <늑대의 혈족>은 넘쳐나는 성적 암시에도 불구하고 필요이상 점잔을 떠는 영화입니다. 20년전 영화이니 그런 느낌이 드는 것도 당연하겠지요. 전형적인 에로영화의 소재를 이렇게 순진하게 풀어내는 것이 차라리 귀엽다는 느낌이 들 정도에요.
사실 <늑대의 혈족>의 가장 큰 문제점은 다른 데 있습니다. 심하다 싶을 만큼, 전혀 무섭지가 않거든요. 꿈과 현실을 오가는 구성도 환상적이기는 하지만 다소 혼란스럽구요. 반면 의외로 재미있는 구석도 있습니다. Stephen Rea가 늑대인간으로 변신하는 장면은 수공업적 특수효과의 조잡함에도 불구하고 무척 즐거운 장면입니다. 늑대인간으로 변신하려면 피부를 발기발기 찢어야 한다나요?
“절름발이가 범인이다!” - 영혼의 카니발 (1962, Carnival of Souls)
<여고괴담 4: 목소리>는 새로운 시도를 합니다. 귀신이 주인공으로서 영화 내내 등장하는 것이지요. 이건 마치 패를 보여주고 치는 고스톱 같다고나 할까요? 공포의 원천으로서 적절한 타이밍에만 제한적으로 귀신이 등장하는 것이 기존 공포영화의 공식일 터인데, 도대체 어떻게 영화를 풀어나갈 생각인지, 궁금해집니다.
주인공이 알고 보니 귀신,이라는 반전은 <식스 센스>나 <장화 홍련> 등을 거쳐 지금은 익숙해진 설정이지만, <식스 센스> 개봉 당시의 관객들을 그 반전에 큰 충격을 받았더랬죠. 하지만 그 놀라운 반전도 사실 이전에 다른 공포영화들에서 그 전례를 찾을 수 있는데, <영혼의 카니발>이 그 중 한 편입니다.
3주 동안 3만 달러의 제작비로 만든 이 전설적인 컬트영화는 조지 로메로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을 비롯해 수많은 공포영화들에 영감을 주었습니다. 정식 배급 대신 드라이브인 씨어터를 통해서 상영되는 등 당시에는 평가받지 못했지만, 수년전에 크라이테리언에서 2 디스크의 DVD로 출시되는 등 지금은 걸작 호러 클래식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사실 이 영화는 많은 단점을 갖고 있습니다. 특수효과는 조잡하고 주인공을 제외한 나머지 배우들의 연기도 어색합니다. 가장 큰 문제점은 플롯상의 허점인데, <식스 센스>가 도시인의 고립감을 빌어 죽은 자 말콤 크로우의 존재를 설명한 반면, 이 영화에서는 사고사한 Mary가 어떻게 산 사람인 것처럼 버젓이 돌아다니고 대화할 수 있는지, 전혀 설명이 되지 않고 있지요.
하지만 많은 단점과 40여년의 시간적 간극에도 불구하고 <영혼의 카니발>은 무척 무서운 영화입니다. 심지어 그건 충격적인 결말을 안 상태에서 이 영화를 봐도 여전히 무서워요. 그건 이 영화가 유발하는 공포가 사건 자체보다 그 기묘하고 음산한 분위기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일 거에요. 특히 감독 Herk Harvey에게 이 영화의 영감을 준 Saltair 놀이공원의 살풍경과 그곳에서 Mary가 정체모를 흉칙한 사람들에게 쫓기는 장면은 악몽처럼 끔찍합니다. <텍사스 전기톱 연쇄살인사건>에서 래더페이스의 추격씬보다 무섭다니까요.
될성부른 나무의 떡잎 - 엘리베이티드 (1997, Elevated) ; 알리사 (1994, Alicia) ; 빛이 없는 나날들 (1995, Días sin lu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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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여름 개봉하는 한국 공포영화들은 한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김용균 감독의 <분홍신> 이외의 다른 영화들은 단편영화 등을 통해 기량을 인정받은 감독들의 장편 데뷔작이라는 점이지요. 작품의 완성도를 떠나 공포영화로서는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았던 <남극일기>의 임필성 감독 역시 <소년기>나 <베이비>같은 단편영화로 각종 영화제를 휩쓸었고, <가발>의 원신연 감독은 <빵과 우유> 등의 단편과 <구타유발자>의 시나리오를 쓰며 독립영화계에서 두각을 나타내었습니다.
공포영화를 장편 데뷔작으로 선택한 감독은 부지기수지만, <큐브>와 <싸이퍼>의 감독인 빈센조 나탈리와 <네임리스>, <다크니스> 등을 감독한 하우메 발라구에로는 장편 데뷔 이전, 완성도 높은 공포 단편영화로 이미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습니다.
폐공간에 갇힌 사람들의 광기와 공포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엘리베이티드>는 빈센조 나탈리의 뛰어난 장편 데뷔작 <큐브>를 연상시킵니다. 단편영화라는 시간적 한계 때문에 <큐브>와 같은 수학적/논리적 구성은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20여분의 짧은 러닝 타임동안 주인공이 발작적으로 폭력을 행사할 만큼 철저한 패닉에 빠지게 되는 과정을 설득력있고 충분히 끔찍하게 묘사합니다. 강도 높은 고어씬과 전형적인 깜짝쇼 등의 흥미로운 호러 장치들은 감독의 상업적 역량을 짐작케 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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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메 발라구에는 <알리시아>와 <빛이 없는 나날들>이라는 단편영화에서 강한 성적 암시와 고어씬을 빌어 모성애와 신성(神性)에 대한 부정적 관점을 기괴하고 몽롱하게 연출합니다. <빛이 없는 나날들>에서 자신을 버리고 지하로 잠적한 어머니와 전쟁터에서 처참하게 죽어간 아버지를 회상하는 주인공은 “어머니는 왜 자식을 버릴까?” 원망하면서도 그 이유를 알고 싶다면 자궁 속으로 다시 들어오라며 관객을 향해 손짓을 합니다. <알리시아>에서 어미의 가슴에선 모유 대신 피가 뿜어져 나오고 이제 막 초경을 시작한 소녀는 그런 어미의 품을 벗어나려 하지만, <빛이 없는 나날들>의 주인공은 자신을 버린 어미의 자궁 속에서 다시 어미와 한 몸이 되고 싶은 근원적인 욕망을 드러냅니다. 가족의 해체와 모성의 파괴, 그리고 그 회복에의 염원을 이처럼 기괴하면서도 애처롭게 그려내는 공포영화도 드물 거예요.
난 남들과 다르다, 유럽형이거든. - 베니싱 (1988, Spoorlo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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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영화의 주인공을 양분해보면 ‘사다코’를 필투로 한 귀신/유령/악마들과 ‘한니발 렉터’나 ‘헨리’로 대표되는 연쇄살인범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선 연쇄살인범이 현실감있는 존재가 아닌 탓인지, 공포영화의 주인공은 원한을 품고 죽은 귀신이 대부분이지요.
프랑스 출신의 감독 게오르지 슬루이저의 영화 <베니싱>은 ‘한니발 렉터’같은 안 좋은 식습관을 가진 살인마나 ‘래더페이스’처럼 단순과격무식한 인간백정, 혹은 ‘테드 번디’같은 비틀린 성욕의 화신이 아니라, 이해하기 힘든 심리적 배경과 복잡한 동기 혹은 사명감을 가지고 살인에 임하는 유럽형 연쇄살인범이 등장하는 영화입니다.
사실 <베니싱>은 영화의 마지막 10분 정도를 제외하면 공포영화라기보다 잘 짜인 스릴러입니다. 사랑에 빠진 두 연인이 어느 휴게소에게 차를 멈추고 여자는 음료수를 사러 갑니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고 남자는 삼 년 동안 그녀를 찾아 헤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납치범임을 주장하는 남자가 그녀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지 않느냐며 연락을 해오는데....
평범한 장소에서의 이유 없는 실종은 로만 폴란스키의 <해리슨 포드의 실종 Frantic>을 연상케하는 설정이지요. 하지만 <베니싱>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실종자를 찾아헤매는 '남겨진 자'의 불안과 추적과정의 서스펜스를 보여주는 대신, 영화 초반부에 일찌감치 그 정체가 드러나는 '납치범'의 일상과 사전준비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때때로 드러나는 성마름과 정서불안에도 불구하고 납치범은 정상인과 그다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어설픈 계획으로 낭패를 보기도 하고, 고등학교 교사쯤 되는 듯한, 어엿한 직업도 갖고 있구요.
이런 설정에서는 보통 '저렇게 정상적으로 보이는 인간도 일순 빡돌면 폭력적이고 반사회적인 행동을 할 수 있다, 이렇듯 소위 중산층의 도덕률이란 위선적이고 우리들이 보고 있는 표면상의 안정과 평온 밑에는 어두운 욕망이 꿈틀댄다' 같은, '연쇄살인범' 영화의 닳고 닳은 인간관/세계관을 반복하기 일쑤죠. 하지만 이 영화의 납치범은 그런 평범한(?) 동기를 갖고 있는 범죄자가 아닙니다. 영화에서 보여진 것 이상으로, 영화를 통해 관객이 착각하게 된 것 이상으로 사악하고 비열한 인간이라는 것이 영화 후반부에 드러납니다. 이것이 바로 충분히 예측가능한 이 영화의 결말(이 결말을 예측할 수 있는 단서들은 영화 초반부부터 심하다 싶을만큼 많이 등장합니다. 하기야 그런 사실들은 영화를 다 보고 나야 끼워맞출 수 있는 성질의 것이긴 하지만요.)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장면의 충격이 덜해지지 않는 이유겠지요.
편견인지 몰라도 프랑스/네덜란드제 납치범이 아니라 미국제 납치범이었다면, 그 잔악한 행위들에 기가 질릴지언정, 이 영화만큼 '섬찟'한 느낌을 받게 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고보면 <헨리: 연쇄살인범의 초상>에 분개하던 <나의 즐거운 일기>의 난니 모레티의 심정이 이해가 가기도 하는군요. 스트레이트하기만 할 뿐, '품위'가 없잖아요, 헨리는? 어쩐지 이해할 수도 있을 것만 같은 느낌도 들고. 하지만 이 영화의 레이몽 같은 인간을 도대체 누가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올 여름에도 변함없이 공포영화들이, 그것도 촉망받는 신인감독들이 그들의 데뷔작으로 삼은 공포영화들이 여러 편 개봉하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공포 영화는 제작비가 비교적 적게 들고 나름의 관객층까지 확보되어 있어, 상업영화 감독으로서의 입지를 굳히는데 안전한 발판이 될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올 여름 개봉되는 한국 공포영화들 역시 완전히 새롭고 창의적인 소재와 방식으로 공포를 직조하려는 건 아닙니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경구처럼 그런 시도 자체가 애시당초 불가능하기도 하거니와, 새로움과 반전에 대한 강박은 소재주의로 변질될 소지도 있지요. 다만 역량을 인정받은 감독들의 데뷔작들이 많은 만큼 장르의 안정성에 기대어 관객의 공포를 날로 먹으려는 무성의한 영화가 아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만만한 관객도 아니구요.
아직 뚜껑이 열리지는 않았지만, 올 여름의 한국 공포영화들은 다양한 소재와 전략으로 공포의 감각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무섭기까지 하다면 금상첨화겠지만, 그다지 무섭지 않더라도 ‘공포’에 대한 참신한 해석과 감독 자신의 색깔과 주제의식이 선명한, 그런 공포영화를 기대하겠습니다. 관객들이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를 오래도록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무서웠기 때문은 아니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