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 액츄얼리? 사실 사랑은? 특히나 타국인의 눈으로 보기엔 뜻모를 이 제목은 "사실 사랑은 어디에나 있다"는 극중 나레이션에서 따온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감정 중 으뜸이라는 사랑이 어디에나 도사리고 있다는 것은 <러브 액츄얼리>의 대전제 중 대전제. 심지어 영화는 좋은 건 몽땅 골라 넣은 선물세트처럼 사랑의 모든 형태를 보여주고 싶어하는 야심마저 숨기지 않는다. "9. 11 테러 당시 죽어가는 사람들이 남긴 것은 하나같이 사랑의 메시지였다." 각양각색의 사람들로 붐비는 히드로 공항을 배경으로 흘러나오는 휴 그랜트의 나레이션은 그 자체로 영화의 키워드.
고로, "사랑이 그렇게 대단한 겁니까?"라는 볼멘소리는 적어도 <러브 액츄얼리>의 세계에서는 유효하지 않다. 로맨틱 코미디 나라 국민답게, 그러니까 사랑의 가치에 대한 추호의 의심도 접어둔 채 바라본 이 꽤나 절묘한 제목의 영화는 장르의 모범답안이자 퍽 잘 만들어진 당의정이다. 총리와 워킹클래스 아가씨 사이의 스파크며 말이 통하지 않는 두 사람의 사랑까지 따지고 보면 단순하지 않은 애정의 단상들이 낙천적인 외피에 힘입어 달착지근하게 관객 안으로 스며든다. 그런 한편 목을 칼칼하게 하는 건 보다 현실적인 이야기들. 남편의 배신으로 눈물짓는 중년 여성의 공기 같은 사랑, 나를 지켜주는, 또 내가 지켜줘야 할 가족이나 오랜 친구를 향한 묵직한 애착들. 흔히 사랑하면 떠올리게 마련인 이성과의 관계가 아닌, 그러나 더욱 결 곱고 단단한 이런 감정들은 <러브 액츄얼리>에 힘을 실어주는 요소들이다.
다우닝가 10번지 수상관저에 갓 입성한 신임총리(휴 그랜트)는 차담당 비서 아가씨(마틴 맥커천)에게 첫눈에 반하고 만다. 스스로를 한껏 다잡아봐도 소년처럼 요동치는 가슴을 숨기긴 힘들다. 바야흐로 총리, 인생의 봄을 맞다. 한편 아내로부터 배신당한 소설가(콜린 퍼스)는 일도 하고 조각난 마음도 추스릴 겸 한적한 프랑스 남부로 날아갔다 집안일을 도와주는 포르투갈 아가씨와 사랑에 빠진다. 문제는 두 사람이 서로의 말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것. 직장 상사(알란 릭맨)는 줄기차게 같은 회사 남직원을 짝사랑만 하는 여직원(로라 리니)이 안타까워 두 사람을 연결해 주려 한다. 하지만 그 역시도 다른 매력적인 여직원의 유혹에 마음이 흔들리고, 아내(엠마 톰슨)는 남편의 배신을 눈치채고 눈물을 흘린다.
줄기차게 퇴짜만 맞던 껄렁쇠 콜린은 미국에 가서 쿨한 영국악센트로 늘씬한 미국아가씨들을 녹다운 시키겠다는 꿈에 불탄다. 비틀즈의 "All You Need Is Love"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행복한 새 가정을 꾸린 신부(키라 나이틀리)는 자신에게 차갑게 대하는 신랑의 죽마고우 때문에 고민에 빠진다. 젊은이들 삶만 삶이더냐. 마약에 쩔은 퇴물 락커 빌리 맥(빌 나이히)은 "Love Is All Around"(그렇다. <러브 액츄얼리>의 감독 리차드 커티스가 각본을 쓴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에 삽입됐던 그 노래다)를 개사한 조잡한 크리스마스송 "크리스마스는 어디에나"로 다시 한 번 인생의 활황을 맞는다.
영국의 로맨틱 코미디 명가로 통하는 제작사 워킹 타이틀은 로맨틱 코미디 외에도 코엔 형제 작품을 비롯한 흥행성과 함량 겸비한 영화들의 제작사이자 <빌리 엘리어트>로 스티븐 달드리를 발굴한 일등공신으로도 꼽힌다. 달리 말해 제작사 이름만으로도 확고한 네임밸류를 획득한 드문 케이스. 그러나 역시 워킹 타이틀을 대표할 만한 이름은 영화사 스스로 공공연히 인정하는 것처럼 리처드 커티스임에 분명하다.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 <노팅 힐>, <브리짓 존스의 일기> 같은 업그레이드 된 로맨틱 코미디로 세계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휴 그랜트의 이름을 여성들의 심장에 달콤하게 새겨놓은 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공로.
한편 TV시리즈 <미스터 빈>의 각본가를 거쳐왔다는 점만 보더라도 예상하기 어렵지 않듯, 리차드 커티스표 영화의 빼놓을 수 없는 정체성 중 하나는 흘러 넘치는 유머다. 그런 의미에서 <러브 액츄얼리>는 워킹 타이틀표 영화의 집대성. (물론 누구나 제기할 수 있는 자기복제의 혐의까지도 인정해서다. 관객들은 <러브 액츄얼리>의 주인공 안에서 브리짓 존스를, <노팅 힐>의 윌리엄을, 그 외 각기 다른 캐릭터들을 겹쳐볼 수 있다) 앞에서 영화가 보여주는 각종 사랑의 단상들에 대해 열거했지만, 사실 진짜 돋보이는 주인공은 유머일 수 있다. '미스터 빈' 로완 앳킨슨이 복병처럼 튀어나와 스크린 속을 어슬렁거리고, 톡쏘다 못해 칼칼한 이른바 영국식 유머들이 곳곳에서 번쩍거린다. 일례로 망나니 록스타 빌리. 늙으면 노쇠한다고 그 누가 그랬던가. 생방송에서도 인기가수 블루(물론 실존하는 그 블루다)의 대형 브로마이드에 "내 XX는 땅콩만 해!"라는 낙서를 천연덕스럽게 휘갈기는 빌리 맥은 존재 자체로 시한폭탄이다. 그가 청소년들을 향해 일갈한, 스튜디오를 아수라장으로 만든 문제의 발언이 과연 무엇인지는 보는 사람의 즐거움으로 남겨두겠다.
배우들의 매력도 빼놓을 수 없다. 휴 그랜트, 콜린 퍼스와 엠마 톰슨, 리암 니슨, 로라 리니에 키라 나이틀리까지 지성과 스타성을 겸비한 배우들의 향연은 오감을 즐겁게 한다. 특히 엠마 톰슨과 로라 리니 두 여배우의 진심 묻어나는 연기와 '세계 유일의 안아주고 싶은 중년남자' 휴 그랜트의 매력은 의심의 여지없는 영화의 백미. 로완 앳킨슨과 데니스 리차드, 클라우디아 쉬퍼에 이르는 카메오들의 출현도 숨은 그림 찾기 같은 재미를 선사한다.
한편 [롤링스톤]의 피터 트래버스나 [뉴욕타임즈]의 A.O. 스콧 같은 몇몇 미국 평자들이 신랄하게 쓴 대로, 감동을 강요한다거나 산만하다는 지적은 적어도 <러브 액츄얼리>에 있어 그리 억울한 누명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때로 지나치다 싶게 낙천적이며, 등장인물과 에피소드가 넘쳐나는 탓에 부랴부랴 이야기를 매듭지어 버리는 이 크리스마스 영화를 비난하기는 쉽지 않을 것. 황량한 마음과 별개로 크리스마스의 트리장식은 늘 아름답듯, 관객이 이 달콤쌉싸름한 당의정을 기꺼이 삼키리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러브 액츄얼리>는 좋아하는 사람으로부터 날아온 짓궂고 예쁘장한 크리스마스 카드 같은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