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작 [친구]에서처럼 곽경택 감독은 복고와 남자이야기라는 두 가지 코드로 [챔피언]을 이끌어 간다. 70년대 후반~80년대 초반으로 설정된 시대는 삼양라면, 맨소래담, 칠성사이다 CM송, 리바이스등 이미 보통명사처럼 쓰이는 고전적인 상품들과 덥수룩한 머리에 촌스런 옷차림의 사람들, 초록색 택시가 지나가는 풍경으로 생생하게 재현된다. 복고는 '발견'의 장치로써 관객들의 기억을 일깨우며 쏠쏠한 재미를 준다. 영화가 웃음을 유발하는 수법도 그와 비슷하다. '붕어빵에 붕어가 들어있으면 빈대떡에는 빈대가 들어있게' 따위의 유머, TV 카메라 앞 어색한 관중의 모습은 '다 아니까' 즐겁다. 영화는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기억의 시대를 거스르면서 그 시대의(혹은, 그 시대의 것이라고 오인되는) 사람 냄새까지 빌려온다. 그 훈훈한 인간미는 유오성의 순박한 로맨스를 타고 흐르며 치열한 권투 장면의 비정함과 대비되는 동시에 그것을 희석시킨다. 따라서 영화의 분위기는 너무 건조하지도, 너무 축축하지도 않게 조정된다.
그러나 순하게만 살아서는 이 각박한 현실 헤쳐나갈 수 없는 법. 가진 건 맨몸뚱이뿐인 사람들의 '공평한' 게임, 권투는 그들의 고단한 삶을 대변한다. 몸으로 부딪혀 상대를 물리쳐야 살아남을 수 있기에 권투선수는 항상 죽음의 위협에 시달린다. 그들이 느끼는 삶과 죽음 사이의 팽팽한 긴장은 김득구가 승리를 거둔 후 링에서 내려와 뇌까리는 '행복'이란 단어에 서글프게 묻어난다.
하지만 김득구 역시 가부장제의 적자는 아니다. '애비' 없이 자란 그는 '관장'을 대리 아버지로 삼아 가부장제 사회로의 편입을 시도하지만 결국 권투선수 출신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은 맨시니에게 패배하고 만다. 약혼녀와의 결혼도 무산된다. 가부장제란 공고한 것이어서 타자에게는 그만큼 배타적이라는 것일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부장제의 환상은 다음 세대에서도 이어진다. 또다시 애비 없는 자식으로 태어난 김득구의 아들은 관장을 만나면서 아버지의 환영을 본다. 부재하는 아버지에 대한, 흔들리는 가부장제에 대한 남성들의 그리움은 계속된다.
실패한 영웅담은 주인공을 땅으로 끌어내리며 애틋한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챔피언]이 그려내는 김득구는 가난했던 시절, 척박한 한국을 일궈냈던 옛 아버지들과 겹쳐지며 사사로운 감정을 우려낸다. 유오성의 투박한 분위기는 때에 따라 묵직하게도, 촌스럽게도 변화하며 관객을 휘어잡는다. 그가 다져온 '소탈한' 카리스마는 이성으로 대변되던 아버지의 세계에 감성까지 부여함으로써 완벽한 신화를 창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