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속배달을 사명으로 삼고 일해야만 하는 피자 종업원임에도 그 법통을 어겨 스판쫄쫄이 대신 배달 헬멧을 뒤집어 쓴 채 주인에게 호되게 한 소리 듣고, 학교수업 역시 지각하기 일쑤고, 밀린 월세금 때문에 집주인에게 닦달당하고, 연애질 또한 신통치 않기는 마찬가지다.
누가?
누구긴 누구이겠는가? 전 지구적인 인기를 구가하며 세계인들의 눈과 귀를 거미줄 하나로 단단히 사로잡은 거미 인간 스파이더맨을 말하지.
<스파이더맨2>의 시작은 이렇다. 이는, 변죽만 울리며 이야기는 방만하게 풀어놓은 채 위압적인 크기로 모든 것을 잠식해버리려는 블록버스터의 속편 공식에 현혹되지 않고 마블 코믹스 원작에 충실한 것임을 호언한 샘 레이미 감독의 의중을 초장부터 여실히 반영한 것이다. 그리고 그 의도는 꽤나 성공한 듯 보인다.
10대의 질풍노도시기를 거쳐 사회에로 편입되기 위한 통과의례를 단단히 치르는 대학생 피터 파커의 이야기를 전편에 이어 성장드라마 식으로 엮어 보여줌으로써 <스파이더맨2>는 선배 영웅들의 신화에 가까운 서사얼개와 여러 모로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유전자 구조부터가 남다른 슈퍼맨, 아마존 왕국의 공주인 원더우먼, 떼부자인 배트맨, 반빙신에 다름 아닌 다중 인격으로 심하게 번뇌하는 헐크와는 달리 옆집에 사는 똘이처럼 여느 보통 청년의 모습과 하등 다를 바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 거미인간을 쌍수로 맞이하며 열광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대의적 명분과 개인적 욕망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며 ‘선택’ 이라는 인생사에 있어 중차대한 문제에 골몰하는 피터 파크의 혼란스런 자화상은 실존적 무게감이 실려 있으면서도 하이틴 로맨스 소설의 주인공처럼 가볍게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후자는 토비 맥과이어의 순둥이 같은 범생이 이미지와 스토리의 상당부분을 꿰차고 있는 피터 파커와 메리 제인(커스틴 던스트)의 밀고 당기는 연애행각이 있기에 가능한 얘기다.
그렇다면 캐릭터를 중심으로 한 드라마에 비중을 둔 <스파이더맨2>의 휘황찬란한 스펙터클은 상대적으로 위축되었느냐? 하면 그게 또 그렇지 않다는 게 이 영화의 미덕이다.
다만, 선악의 경계가 느슨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긴 하지만 그 모호함을 매혹적으로 관장하지 못한, 촉수와는 별도로, 닥터 옥터포스의 뜨뜻미지근한 캐릭터 성격에 아쉬움이 남는다. 말 나온 김에 관객의 입장으로서 한마디 보태 과욕을 부리자면 이야기의 맥락에 크게 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예의 샘 레이미 그 특유의 전복성의 인장이 황홀한 광경에 조금만 더 새겨졌으면 하는 바람이 존재한다는 거다.
어쨌든, 우직하면서도 지혜로운 방식으로 속편의 돌파구를 제대로 찾은 <스파이더맨2>는 어딜 내놔도 쪽팔리지 않을 정도로 여름시즌 대작으로서의 미덕과 장점을 두루두루 갖춘 썩 괜찮은 영화다.
● 필히 기억하시라!
본문에서도 전언했지만 종래의 완전무결한 또는 묵직한 존재로서의 영웅들과 멀어도 한참 먼 평범한 대학 영계남이 스파이더맨의 본 모습이다. 그 같은 점을 반영하는 장면과 이야기들은 영화 속에서 수도 없이 펼쳐진다. 그러나 결정적 증거물이 될 그것이 후반 도심 전철 지붕위에서 닥터 옥터퍼스와 맞장을 뜬 후 바로 발각된다. 또렷한 윤곽을 도드라지게 볼록 드러내며 튼실하게 자리 잡은 듯한 하복부의 낭심이 여과 없이 화면에 포착됐다는 말씀. 기존의 초인들이 거미인간과 유사한 스판쫄쫄이 복식의 빤스 또는 바지를 착용했음에도 성기와 그 언저리들의 높낮이가 다리미로 다린듯 민자의 굴곡 없음을 보여준 그간의 사례를 비추어볼 때 본의 아니게 이 영화의 백미가 된 이 한 장면은 다시금 환기시킨다. 스파이더맨은 달릴 거 달렸고, 나올 때 확실히 나온 양기 출중한 격의 없는 다정한 우리네의 이웃사내라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