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사 크리스티의 [나일 살인사건] 많은 장르문학은 그 태생부터가 영화와 닮은 꼴이다. 대중을 상대로 한 엔터테인먼트 사업이라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수많은 장르문학은 영화계의 러브콜을 받으며 영상으로 옮겨지곤 한다. 호러문학이나 SF등이 그러하듯 추리문학 역시 매니아층의 호응을 등에 없고 수없이 많은 작품들이 영화화되곤 했다. 영화속에서 가장 많이 등장했던 캐릭터가 셜록홈즈라는 사실만봐도 추리문학을 향한 영화계의 이런 짝사랑은 증명이 되는 셈이다. (셜록홈즈 211편, 드라큘라 159편, 프랑켄슈타인 115편. 93년판 기네스북 영화관련부문)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리매니아를 만족시키는, 원작을 뛰어넘는 영화는 그다지 많지 않다는게 매니아들의 생각이다. 아마도 소설속에서 상상으로 그려오던 멋진 탐정들에 대한 이미지, 계속 생각하게 만드는 복잡한 트릭들, 논리와 대화가 주가 되는 소설의 매력을 담아내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코난 도일 시절부터 시작되어온 추리소설의 영화화는 지금도 스티븐 킹, 마이클 크라이튼등으로 계속 그 역사가 이어져오고 있다. 미스터리 장르가 환영받지 못하는 우리의 풍토에서 최초로 성공을 거둔 본격 추리영화가 바로 [나일 살인사건]인데, 1981년 국내 개봉되었으며 EBS 세계의 명화 등에서 여러번 소개되었고 비디오로도 출시되어 있다. 또한 1999년 크리스티의 유가족들이 원작을 현대에 맞게 각색할수 있도록 허락함으로써 앞으로 더 많은 영화들을 만나게 되리라는 기대감을 주고 있다.
원작자 아가사 크리스티는 추리 매니아라면 누구나 다 알 듯이 추리소설의 여왕이라고 불리우는 세계적인 추리작가이다. 영국 데본 주의 바닷가 휴양지 토르케이에서 태어난 그녀는 부유한 미국인 아버지와 영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어릴때부터 가정교사로부터 교육을 받은 상류층 사람이였다. 수줍은 성격이였던 그녀는 파리의 음악학교에서 성악과 피아노를 공부했고 피아니스트로의 뛰어난 기량도 인정받았지만 무대공포증으로 인해 그러한 재능을 포기해야했다. 글쓰기에도 탁월한 재능이 있던 아가사 크리스티는 1차 세계대전 당시 적십자사에 자원하여 병원의 약국에서 근무하면서 처음 추리소설을 쓰게 된다. 마지막 페이지를 읽기 전까지는 도저히 풀수 없는 미스터리를 만들어낼수 있겠느냐로 언니와 내기를 한 그녀는 약국에 무단 결근을 하고 호텔방에 틀어박혀 작품을 쓰기 시작했고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그녀의 첫작품인 [스타일즈가의 수수께끼]이다. 그리고 이 첫작품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그 유명한 탐정 에르큘 푸아로이다. [스타일즈가의 수수께끼] 이후 에르큘 푸아로는 그녀의 수많은 작품속에 등장하면서 그녀의 분신처럼 자리잡았는데, 그녀가 얼마나 이 탐정을 사랑했는지는 그녀의 유언에 따라 마지막 작품이 발표되면서 더욱 실감할수 있었다. 1976년 그녀가 세상을 떠나고 난후, 유언에 따라 은행 금고에 보관되었던 마지막 작품이 발표되었는데, 마치 자신의 죽음과 함께 해달라는 듯 에르큘 푸아로의 죽음으로 끝나는 작품 [커튼]이 바로 그것이다. 작가의 사후에 캐릭터가 다른 목적으로 이용될 것을 두려워한 배려였다고 하니 그녀가 얼마나 푸아로를 아끼고 있었는지 짐작할수 있다.
1940년대에 쓰여진 것 같은 이 작품을 끝으로 더 이상 그녀의 작품도, 에르큘 푸아로의 활약상도 기대할수 없지만 그런 아쉬움은 스크린속에 되살아난 영화들을 통해 조금은 지울수 있지 않을까? 그녀가 추리소설의 여왕이라고 불리우고 또 그녀의 수많은 작품들이 영화화되는데는 이유가 있다. 우선 표면상의 완전범죄, 정황증거상 지목되는 범인의 무죄가 밝혀짐, 뛰어난 관찰력과 추리력을 가진 탐정의 활약, 예기치 않았던 진상이 드러나면서 가지는 반전. 이러한 추리소설의 기본 요소들을 아가사 크리스티만큼 적절하게 묘사한 작가를 찾기가 힘들다는데 있다. 모든 등장인물을 혐의자로 몰아가다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인물을 범인으로 만들어 내는 그녀의 솜씨도 놀랍지만 그런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탐정의 캐릭터 역시 매력적이다. 시골 노처녀 미스 마플을 시작으로 땅딸한 키에 게으른 에르큘 푸아로, 장난끼 많고 덤벙거리는 부부탐정까지, 그녀가 만들어내는 탐정들은 모두 약간의 약점은 가지고 있지만 미워할수 없는 인간적인 매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대개의 추리작가들이 자신의 작품에 한두명의 탐정만 등장시키지만 그녀의 경우에는 이외에도 할리 퀸 등의 탐정이 있다. 80여편의 장편과 100여편의 단편, 20여편의 희곡등은 많은 작품을 발표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그녀의 작품중 에르큘 푸아로가 활약한 작품은 [스타일즈가의 수수께끼]를 시작으로 모두 37편에 달한다.
푸아로는 5피트 4인치의 키에 달걀모양 머리를 하고 있으며 언제나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고 있고 옷차림은 단정하고 먼지 하나가 총상보다 더한 고통을 느낄 정도라고 소설에서는 묘사되어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푸아로의 특징이라고 할수 있는 것은 빳빳하게 군대식으로 기른 콧수염인데 이것 역시도 왁스로 기름칠을 하고 손질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고 그려져 있다 호박 재배와 다 탄 성냥을 모으는 이상한 취미를 가진 독신남, 페미니스트이면서 대단한 멋쟁이로 묘사된 푸아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독특한 촌스러움이 흐르는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한때 벨기에에서 유명했던 경관인 푸아로 탐정은 1차대전중 영국으로 망명 사립탐정이 된 것으로 나온다. 스스로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탐정이라는 자화자찬을 하는 그의 어린아이같은 거만한 태도는 용의자들에게 무시되기도 하지만 멋지게 사건을 해결할때마다 그가 자랑하는 회색 뇌세포가 존경스럽기도 하다. 푸아로가 등장한 작품중 영화화된 것으로는 [나일 살인사건]을 비롯, [백주의 악마], [13인의 만찬], [오리엔트 특급살인] 등이 있다. [나일 살인사건]은 [구름속의 죽음], [오리엔트 특급살인]과 함께 크리스티의 걸작으로 꼽히는데 각각 비행기, 열차, 유람선등 막힌 공간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다루고 있다. 각각 범인이 빠져 나갈수 없는 공간속에서 한정된 혐의자를 두고 추리를 시작한다는 유사점을 가지고 있는데 아가사 크리스티의 작품의 특징이라고 할수 있는 막힌 공간에서의 살인사건은 영화화되기에도 적합한 배경으로 보여진다.
아가사 크리스티는 고고학자인 남편과의 여행으로 작품속에 다양한 나라의 풍광들을 등장시키고 있는데 [나일 살인사건] 역시 중동 지역을 여행하며 구상한 작품이라고 한다. 영화 [오리엔트 특급살인]이 흥행에 성공하자 그에 힘입어 또 다시 영화화된 [나일 살인사건]의 연출은 존 길리먼이 맡았다. 감독 존 길리먼은 다큐멘터리를 연출하다가 우리나라에서도 잘 알려진 타워링, 킹콩 등을 감독하면서 그 명성을 쌓아가던 중 이 작품을 연출하게 된다. [나일 살인사건]은 캐스팅부터 화제를 불러일으킨 영화였다. 워낙 아가사 크리스티원작의 영화들은 화려한 캐스팅으로 유명하지만 이 영화 역시 한명 한명 모두 주연을 맡아도 손색이 없는 배우들인 베티 데이비스, 미아 패로우, 매기 스미스, 잭 워든, 올리비어 핫세, 안젤라 랜스베리등이 출연하여 연기대결을 펼쳤다. [오리엔트 특급살인]에서는 앨버트 피니가 포와로 역을 맡았던 반면 [나일 살인사건]에서는 피터 유스티노프가 캐스팅되어 원작과는 조금 다르지만 더 지적이고 다정다감한 푸아로를 표현한다.
피터 유스티노프는 영화 [쿼바디스]에서 불타는 도시 로마를 보며 시를 읊던 네로 황제를 연기하기도 했던 연기파 배우로 이 작품이후 3편의 영화에서 또다시 푸아로 역을 소화함으로써 명실공히 푸아로 전문배우로 자리매김 한다. 알콜중독에 빠진 연애소설작가 역의 안젤라 랜스베리는 TV 시리즈 [제시카의 추리극장]으로 유명한 배우인데, 베티 데이비스와 함께 이 영화에서 최고의 연기를 보여준다. 플롯과 단서들이 꼼꼼히 배치되어있어서 영화를 보는 동안 눈여겨보지 않으면 절대 포와로와의 추리대결에서 이길수 없을 만큼 탄탄한 구성을 가지고 있다. 2시간이라는 약간은 긴 시간이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이집트를 배경으로 마치 함께 유람선을 타고 여행을 하고 있는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 소설을 먼저 읽고 영화를 본다면 아마도 소설속의 인물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특히 소설속의 푸아로가 어떻게 형상화되어 있는지), 영화속에서 어떻게 교묘히 사건을 재구성하고 있는지 하는 등의 잔재미를 즐기며 볼수 있지 않을까 싶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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