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 ‘미하엘 콜하스’를 연기한 ‘매즈 미켈슨’의 매력을 피할 수 없었다. 같은 남성이면서도 그의 강렬한 남성미에 이끌렸고, 그의 무게감 큰 연기는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을 압도했다. 길지 않고 짧은 그의 말과 함께 간결하면서도 의미가 깊은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는 영화의 모든 것이었고 영화의 매력을 한껏 높였다. 그런 그의 연기 덕분에 영화를 보는 것 자체가 너무 즐거웠다. 하지만 영화 속에 담긴 신분제 사회에 대한 울분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영화가 만들어졌을 것이고, 관객에게 정당한 평가가 과연 신분제 사회에서 가능할 것인가라는 본질적 질문을 갖게 만든다. 뭘 잘못 했느냐가 아니라 상류층에 도전했다는 것 자체가 죄가 되는 세상은 가혹하기 그지 없다. 귀족이 지배하는 세상이란 것이 그런 것이다. 기껏해야 핏줄 하나만으로 즐거움을 갖고 태어난 인간들인 귀족은 사실 불공평을 양산하면서 사회적 정의를 망가뜨리는 존재다. 남작이든 백작이든 심지어 왕이란 것 자체가 사회적 책임을 지면서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권익을 독점하면서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는 법이다. 그런 속에서 일반 백성들의 부당함을 분노를 자아내기 마련이며, 어느 순간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는 주체가 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왕국이 무너졌고 독재가 무너지는 것이다. 억울함으로부터 시작하는 영화 속 불운은 평화롭게 지내온 한 가족은 파탄으로 몰아간다. 새로 온 나이 어린 남작의 만행으로 시작된 영화 속 긴장은 결국 귀족 사회가 얼마나 사악한지를 제대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에 대해 저항하게 되는 서민, 미하엘 콜하스의 도전은 귀족사회에 대한 저항임을 상징한다. 문제는 억울함을 극복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법정에서의 투쟁도 아니었고, 억울함을 해결하기 위해 왕을 찾을 수도 없었다. 그냥 당하는 것이야말로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그러나 그 희생을 오직 서민이나 약자만이 뒤집어 쓰는 세상은 결코 우아할 수 없는 것이다. 콜하스의 저항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나름대로 사회의 규율을 지키며, 사회적 규율이 서민들에겐 빌어먹을 것이었지만 그래도 안락한 삶이 보장된다면, 그리고 자신의 노동력을 통한 정당한 삶이 보장된다면 그래도 참을 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귀족 사회는 사악한 것이며, 그런 아름다운 미래를 보장해 줄 리가 없다. 어차피 귀족의 입장에서 서민은 자기들이 키우는 못 한 것이다. 덤빈다면 제거하면 되는 것들이니 무서울 리도 없다. 그냥 고분고분 말을 잘 들을 것이라고 그래서 지레짐작한다. 그런데 저항할 때, 두려워 도망가는 어린 남작의 모습을 볼 때, 사회적 책임을 지겠다면서 특권을 향유한 귀족의 추악함도 보인다. 조선의 양반들도 저랬을 것이고, 각국의 귀족들 역시 저랬을 것이다. 그래서 화가 난다. 그런데 이런 분노가 과거의 일만일까? 영화 속 억울함은 사실 남의 일 같지가 않았다. 한국에선 이미 핏줄을 통한 명목 상의 귀족은 사라졌지만 엄연히 서민 위에서 군림하는 귀족이 존재한다. 그것이 강남이든 전문직이든 재벌이든 말이다. 법정의 판사들이나 검사들이 그런 인간들의 눈치를 보는 사이 한국은 실질적인 귀족이 만들어졌고, 앞으로 서민들의 등골을 빼먹고 살려 할 것이다. 그것은 결국 서민들의 삶을 척박하게 만들 것이고, 결국 분노를 폭발할 수 있는 위기감을 고조시킬 것이다. 그런 모든 분노를 미하엘 콜하스는 보여주고 있다. 잘 나가는 말 키우는 사람이 칼을 들고 무력을 행사하며 자신을 핍박한 남작을 죽이려 하는 행동은 그래서 공감이 간다. 아내의 시체 앞에서 그가 겪었을 굴욕감과 분노, 그리고 사랑을 잃어버린 이의 모든 것이 느껴졌다. 앞으로 귀족사회나 그런 귀족처럼 행동하는 자들을 그냥 놔둬선 안 된다. 그리고 저항해야 한다. 놔둔다면 어떤 식으로든 그들은 서민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 것이며, 그들의 탐욕을 채워주기 위해 타인들은 소나 말처럼 일하다가 버림받을 것이다. 그래서 무섭다. 하지만 무섭다고 대충 마무리하면서 도망갈 수도 없다. 그래서 이 영화는 매우 현대적이다. 그리고 무척 고마운 영화다. 이 험악한 시대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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