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에 대한 이해와 관용.... ★★★★
※ 스포일러 주의!!! 영화의 결말 등 주요한 설정이 담겨져 있습니다.
갑자기 일이 몰려 바쁘다보니 1월 18일에 영화를 보고 거의 한 달이 지난 시점에서 감상평을 작성하게 되었다. 물론, 그 사이에 3D로 한 번 더 관람했으니 그렇게 오래 전에 본 영화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겨울왕국>의 흥행 조짐이 심상치 않다. 이미 한국에서 상영한 애니메이션 영화 중 최고의 관객동원 기록을 세웠고, <어벤져스> 기록도 돌파했다. 천만을 넘을 것이란 예상도 등장하고 있다. 실로 경이롭다. 그런데 단지 흥행만 놀라운 게 아니라 일종의 신드롬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의 반응들이 더 놀랍다. 현재 각종 애니 관련한 게시판엔 한 달이 다 되도록 <겨울왕국>과 관련한 다양한 컨텐츠들로 도배 중이다. 말 그대로 열풍인 것이다.
<겨울왕국>은 안데르센의 <눈의 여왕>을 모티브로 한 각본으로 탄생한 영화다. 영화와 안데르센 동화는 전혀 다른 이야기이긴 하지만 <겨울왕국>엔 <눈의 여왕>에 등장하는 다양한 설정들이 담겨져 있다. 트롤이 등장한다거나, 가슴에 얼음조각이 박히는 설정 같은 것들. 스토리는 전반적으로 크게 무리가 없다. 그러니깐 아주 놀랍다거나 하는 건 아니라는 얘기다. 무리는 없지만, 뭔가 허점이 여기저기 보이는 얘기이기도 하다. 결말까지 가는 과정이 매끄럽지 않고 힘들게 힘들게 옮겨 가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엘사의 내적 갈등 과정이 깊이 있게 다뤄지지 못했고, 특히 한스 왕자의 행동은 여러모로 이해가 잘 안 간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건 이런 빈틈이나 덜컹거림이 영화에 단점으로 작용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매력으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이건 결정적으로 캐릭터들의 매력 때문이다. 관객들이 캐릭터들을 가슴으로 받아들인 순간, 단점들은 극복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관객들이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채워 넣어야 하는 여백의 미(美)로 다가오는 것이다. 엘사, 안나, 올라프 등 등장인물(?)들을 중심으로 한 온갖 패러디물이야말로 캐릭터를 관객이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음을 의미한다.
엘사와 안나 못지않게 아마 애니메이션 영화에 등장한 감초 캐릭터 중 가장 긍정적이고 민폐를 끼치지 않는 눈사람인 올라프는 이 영화 흥행의 큰 원동력이 되고 있음도 주지의 사실이다. 대게 이런 감초 캐릭터가 웃음을 주는 데에만 주력하다 민폐 캐릭터로 전락해 주인공을 위기에 빠트리거나 하는 데 반해, 올라프는 오히려 주인공의 모험을 독려하고 “친구를 위해서라면 녹는 것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야” “사랑은 자기보다 그 사람을 먼저 위하는 거야”라는 명대사를 읊으며 가슴 따뜻한 순간들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분명한 차별점이 존재한다. 어쩌면 이 영화에서 진정한 사랑을 보여주는 존재는 올라프일지도 모른다.
당연하게도 <겨울왕국>의 흥행엔 노래가 주는 힘이 만만치 않다. 개봉 전부터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Let It Go>(이 노래를 부르며 머리를 넘기는 엘사의 모습은 이 영화의 가장 짜릿한 순간이다)를 포함해 오프닝을 장식하는 <Frozen Heart>부터 <Do You Want To Build A Snowman?> <For The First Time In Forever> <Love Is An Open Door> <Reindeer Are Better Than People> <In Summer> <Fixer Upper> 등 영화 속 모든 뮤지컬 넘버가 한 번만 들어도 멜로디가 머리에서 맴맴 돌 정도로 엄청난 중독성을 자랑한다. <겨울왕국>은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뮤지컬 공연을 봤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완성도가 높다.
가볍게 언급하자면 영상의 아름다움도 일품이다.
그런데 이런 것만으로 이 영화의 흥행을 얘기하는 건 뭔가 결정적인 알맹이가 빠진 느낌이다. 디즈니는 좀 보수적 이미지가 있다. 아름다운 공주가 위기에 빠지고 잘 생긴 남자 주인공이 등장해 위기를 극복해주며 둘은 사랑에 빠진다. 전형적인 디즈니 영화의 공식이다. 전통적인 공주상을 벗어났다고 평가받는 <라푼젤>조차 문제를 해결하는 결정적 몫은 남자 주인공의 결단력이었다. 그런데 <겨울왕국>엔 왕자든 남자주인공이든 문제 해결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심지어 남녀의 사랑이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는다.
<겨울왕국>의 적극적 해석엔 정치적 공정성, 사회적 정의 등의 개념들이 포함되어 있다. 마법을 지닌 엘사가 내색하지 않고 숨겨야 했던 성장기, 그리고 자신이 원하지 않음에도 드러나게 된 자신의 정체(아웃팅)라든가 그런 엘사를 피하는 사람들, 혼자 살아가려는 엘사의 모습은 흡사 사회의 소수자들이 겪는 차별의 아픔을 표현하고 있는 듯하다. 이런 점에서 안나가 들렸던 상점의 사우나에 있던 가족이 바로 동성애 가족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이는 동성애 커뮤니티에서도 인정하고 있는 데, 이들의 얘기에 따르면 동성애자들은 <브로크백마운틴>보다는 <엑스맨>같은 영화가 더 동성애적 영화라고 느끼며 <겨울왕국> 역시 마찬가지라고 한다.
또 하나의 의미는 앞에서도 잠깐 말했듯이 남자 주인공이 아니라 자매, 여성연대의 힘으로 문제가 해결된다는 점이다. 많은 패러디와 열광적 팬덤의 대상이 남자-여자 커플이 아니라 엘사-안나 커플이라는 점에서 관객들이 이 영화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는 확실하다. 거기에 의도했는지 아니면 어쩔 수 없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엘사의 “방금 만난 남자와는 결혼할 수 없어”라며 디즈니의 오랜 전통을 디스하는 장면은 꽤나 인상적이다.
<겨울왕국>은 추운 겨울을 극복하는 건 타자를 무찌르는 것이 아니라, 타자에 대한 이해와 따뜻한 관용, 사랑이라고 얘기한다. 자신과 다른 타자에 대한 거부감이나 두려움보다는 타자에 대한 이해가 먼저임을 역설한다. <겨울왕국>으로 디즈니는 애니메이션 명가의 자리를 다시 찾을 것이고, 디즈니의 이런 변화가 너무 반갑고 고맙다.
※ 디즈니와 픽사의 합병 시너지는 디즈니가 온전히 누리는 것 같다. 사실 존 라세티같이 픽사의 애니메이션을 주도했던 인물이 디즈니 영화의 엔딩 크래딧도 장식하는 거 보면 이제 디즈니와 픽사 영화를 구별하는 건 무의미해 보인다. 픽사의 <메리다>는 이미 디즈니가 자신들의 공주로 인정까지 했으니 말이다.
※ 현실적이며 조금 삐딱하게 해석하다면, 아렌델 왕국의 통치자는 무책임하게 궁을 비우고 도피해버린 엘사나 그런 엘사를 찾겠다고 나간 안나보다는 스스로 왕이 되고 싶어 한 한스가 더 적격이라고 보인다. 물론 하고 싶다고 다 잘하는 건 아니지만 한스는 국민의 마음을 얻기 위해선 어떤 걸 해야 하는지 아는 확실한 인물이다.
※ 스웨덴에서 영화를 보던 사람들은 스벤이란 이름이 나올 때마다 웃음이 빵빵 터졌다고 한다. 왜냐면 스웨덴에서 스벤은 가장 흔한 이름이라 스웨덴 사람이라면 자신의 이름이 스벤이거나 또는 적어도 주위에 몇 명의 스벤을 알게 된다는 거다. 그러고 보니 동계올림픽 참가 선수 중에도 스벤이란 이름이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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