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훈훈해지고 행복해진다.... ★★★☆
좁은 옥탑방에서 곱사등이 아버지(박수영), 정신연령이 낮은 삼촌(김영재)과 함께 살며, 세상에서 스스로 가장 불행하다고 여기는 완득이(유아인). 그런 완득이를 사사건건 괴롭히는 담임 동주(김윤석). 동주가 죽었으면 하는 게 유일한 소원일 정도로 완득이는 자신을 건드리는 동주를 싫어한다. 그러던 어느 날, 동주는 필리핀 이주민 출신인 완득이 엄마(이자스민)가 어딘가에 살고 있음을 알려주고, 완득이는 엄마와의 만남을 통해 조금씩 성장해 간다.
일단 원작소설을 읽지 않았다. 그래서 원작과의 차이라든가 각색의 방향에 대해선 잘 모르겠다. 가끔 원작소설을 읽지 않고 영화를 보는 것과, 읽고 보는 것 중 어느 게 더 괜찮은 감상 방법인지에 헷갈릴 때가 있다. 아무튼, 원작을 고려하지 않고 영화만을 봤을 때, <완득이>는 너무 착해, 좀 심심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따뜻하고 감동적이며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이야기인 것만은 확실하다.
이 영화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완득이와 동주의 관계이다. 사실상 영화의 모든 이야기는 이 둘의 관계에서 시작하고 끝을 맺는다. 특히 완득이에게 있어 동주는 가족을 제외하고 다른 세상과 소통하는 유일한 통로를 제공하는 존재다. 그러므로 완득이가 교회에서 신을 향해 ‘동주를 죽여주세요’라며 기도할 때, 그건 동주에 대한 적개심의 표현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관심의 표현인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영화가 착하다고 하는 건, 바로 이런 점에서 두드러진다. 스스로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다고 여기며, 어떠한 외부의 것에도 반응하지 않고 무관심한 완득의 저항, 탈선은 과격하거나 자기 파괴적이지 않다. 완득이는 그저 타인과의, 사회와의 소통을 거부할 뿐이고, 그가 주먹을 휘두르는 건 유일한 세계인 아버지와 삼촌이 장애를 이유로 놀림을 받을 때뿐이다. 그러니깐 완득이를 일반적으로 연상되는 불량학생으로 인식하는 건 대단한 실례다.
다음으로 <완득이>는 감정을 억제로 자제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매 순간 오열하거나 울부짖음으로써 감정을 과잉 고양시키지도 않는다. 이런 태도는 한국적 신파와 거리를 둠으로써 영화를 담백하게 보이게 하는 장점은 있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좀 심심하게 느껴질 지점이기도 하다. 그 동안 한국적 신파가 보여주는 감정의 과잉 표출에 부정적이었던 나로선 감정을 자제하면서도 충분히 감정을 고양시키는 한국 영화도 가능함을 본 것 같아 반갑기 그지없다.
완득이가 “라면 먹을래요?”라고 처음으로 엄마에게 말을 건넬 때, 구둣가게 아줌마의 어떤 관계냐는 질문에 “어머니에요”라며 둘 사이의 관계를 인정할 때, 텅 빈 플랫폼에 앉아 모자(母子)가 포옹할 때, 동주에게 “고맙다”며 말을 건넬 때 등등. 이런 장면들에서 조차 <완득이>는 마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무심하게 지나쳐 버린다. 그러나 감정의 유예는 감정을 더욱 깊어지게 한다. 무심코 지나버린 장면들은 곱씹을수록 마음을 아리게 만든다.
그 외에 산동네 옥탑방, 혼혈아, 다문화 가정 등 이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그리면서도 영화의 색채가 결코 어둡지 않고 밝으며, 유머러스하다는 점과 유아인, 김윤석 등 배우들의 자연스러운 연기도 이 영화가 내세울 수 있는 장점일 것이다. 특히 정말 현실에 존재할 것 같은, 학창시절에 경험했던 기시감을 불러일으키는 김윤석의 교사 연기는 실로 일품이다. 물론 <완득이>는 전체적인 짜임새에서 좀 헐거운 것도 사실이다. 기승전결이 없이 여러 에피소드들이 들쑥날쑥 이고 앞에서 말했다시피 심심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의 어두운 이야기를 이토록 따스하고 밝게 그려서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끝내 행복감에 젖게 하는 영화가 어디 흔하던가. 뭐 완득이가 여전히 좁은 옥탑방에 살면 어떠하며, 킥복싱에서 아직 첫 승리를 맛보지 않아도 또 어떠한가. 중요한 건 지금 완득이는 행복하다는 것이다.
※ 처음 다문화 가정, 다문화 사회라는 용어를 만들어 낸 것이 분명 좋은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는 건 이해가 된다. 그러나 처음부터 개인적으론 다문화라는 용어에 부정적이었다. 일반적으로 이주민 가정을 다문화 가정이라 호칭하는 데, 그렇다면 한국인끼리 결혼한 가정은 일문화라는 소리인가? 어차피 문화는 모두 다문화 아닌가?라는 문제의식. 특히 최근에 들어오면서 ‘다문화’는 이주민을 적대시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공격 목표가 되어 버렸고, 그들을 별도로 호칭하는 기준이 되어 버렸다. 교사를 하는 사람들에 의하면 아이들이 이주 가정의 자녀가 지나가면 “다문화”라고 부르며 놀린다고 하니 이미 처음의 긍정적 의미도 퇴색해 버렸다. 그렇다면 대안은? 잘 모르겠다. 아무튼 이 사회가 같이 고민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 소외된 이웃들을 보듬어 안는 <완득이>와 같은 착한 영화가 제공하는 정보에 주연급 출연자들만 있다니, 참 아이러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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