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본 : http://mqoo.blog.me/100122353706
127시간 (127 Hours, 2010)
이 영화의 교훈은 간단하다.
엄마가 전화 하면 꼭 받으라는 것이다.
이하 내용은 이와는 관련없는 잡소리 임을 밝히며
시작한다.
2003년, 아론 랠스톤(Aron Ralston)이라는 한 남자가 유타주 블루 존 캐년을 여행하다 바위에 팔이 끼여 127시간 동안 고립된다. 우리는 영화 <127시간>을 보러 가기 전부터 영화의 바탕이 되는 이 '영화같은' 실화를 알게된다. 바위 틈에 낀 한 남자의 사투와 생존. 결말을 이미 아는 이야기. 가만 생각해보자. 영화의 주요 배경 하나. 등장 인물 한 명. 우리가 언제부터 내용과 결말도 알고 있고, 더구나 한 명의 주인공이 영화 내내 한 장소에만 머무는 영화를 보러 갔다는 말인가? 보통 영화에 대한 정보가 이쯤되면 우리는 관람을 포기하기 마련이지 않나. 뭐, 아니면 말고.
어쨌거나 이러한 실화를 영화로 만들려면 보통 실력으론 어림없을 것이다. 자칫하다 실화가 주는 감동을 배가 하긴 커녕 말아먹지나 않으면 다행인 것을. 허나, 이 <127시간>이라는 영화는 그딴 걱정의 여지따윈 남기지 않는다. 무비스트 정시우 기자의 타이틀을 인용하자면, 이 영화는 이토록 뜨겁다. 개인적으로는 그 공의 팔 할을 감독인 대니 보일에게 돌리고 싶다. 그렇다, 영화 <127시간>을 이야기 하면서 이 사람 얘기를 빼먹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2008년, 그해 아카데미를 휩쓴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꽤 묘한 영화였다. 영국 감독이 인도에서 현지배우를 데리고 찍은 할리웃 영화라니. 아무튼 이 감독의 다음 영화가 기다려졌던 것은 당연지사.
서두에 이야기를 살짝 반복하자면, 아론의 실화를 영화화한다는 것은 어느정도 위험성을 내포하는 일이었다. 한 남자가 바위에 팔이 끼어 옴짝달싹 못하게 되었다가 127시간 후에 탈출에 성공한다, 라는 단 한 문장으로도 요약가능한 이야기를 지루하지 않게 만들기란 얼마나 까다로운 작업인가. 그래서였을까? 감독은 실화가 주는 감동을 살리되, 결코 느슨하지 않은 영화를 만드는 데에 중점을 뒀던 것 같다. 영화는 시작하면서부터 화면을 자르고 자르고 자르는 분할 컷을 거의 영화 내내 선보인다. 내게는 이게 좀 과하지 않았나 싶은 감도 없지 않았다.(뭐, 트집 잡고 늘어질 정도는 아니고.) 그리고 뜬금없지 아니하며 시기적절한 인서트들. 이는 아론(제임스 프랭코)의 심리상태를 대변하면서도 절벽 사이에만 머물러야 하는 영화의 숨통을 터주기까지 한다. 또한 사운드, 이건 극장에 가서 직접 확인하시길. 음악도 음향도 쥑인다.
한 감독과 동시대를 살며 그가 숙성해가는 면면을 발견하는 일은 참으로 즐겁다. 특히, 대니 보일처럼 자신의 장기를 유지 및 발전해가는 경우가 그러한데 <127시간>에서 나는 <트레인스포팅>의 속도를, <밀리언즈>의 포근함을, <28일 후>의 충격을,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아련함을 엿볼 수 있었다.
(영화 초반, 예쁜 언니들과 함께. 포스터에 홀로 이름이 실려 있긴 하지만 사실 제임스 프랭코는 우리에겐 다소 낯선 배우이다. 이렇게 말하면 다들 알까? <스파이더 맨> 시리즈에서 뉴 고블린. 나도 영화를 보고 검색 안 해 봤으면 결코 몰랐을 것이다.)
내가 <127시간>을 보며 가장 좋았던 것 중 하나는, 아론의 고립과 탈출을 결코 자연 대 인간의 대결로 그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여기서 다른 조난 영화들은 운운하며 비교하고 싶은 마음이 있긴 하나, 딱히 떠오르는 영화가 <캐스트 어웨이> 밖에 없으니 제쳐두기로 하자. 127시간 동안 벌어지는 아론의 사투는, 자연을 그 상대로 삼기보다는 그 자신과의 싸움으로 보인다. 그 무대가 되는 블루 존 캐년은 (거기서 그 고생을 하는데도!)어디까지나 아름답고, 포근하고, 광활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또한 블루 존 캐년을 제 2의 고향이라 말하는 아론의 마음이 투영된 게 아닌가 싶다. 하루 15분, 절벽 틈새에 햇살이 비칠 때에는 어머니와도 같은 포근함마저도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말미의 블루 존. 희망의 암시.
<127시간>를 보고난 뒤, 기억에 남는 몇 가지 소도구들이 있다. 첫째는 싸구려 중국산 나이프. 둘째는 캠코더. 그리고 마지막 물통과 수낭. 나머지는 다 그렇다 치고 캠코더만 짚고 넘어가자. 영화에서 캠코더는 꽤 많은 역할을 한다. 인서트로 활용함으로써 영화의 이미지를 더 풍성하게 해주고, 또 다른 아론을 만들어 그와 대화를 시키기도 한다. 또한 자신의 조난 기록을 녹화하기도 하는데, 이런 장면이 있다. 자신을 촬영하던 아론이 절벽 위쪽에서 나는 바스락 소리를 듣고는 미친듯 소리를 지른다. 자기도 모르는 새 그 절규가 녹화된다. 그것을 돌려보는 아론. 제 3자의 눈으로 본 자신. 그 처절함. 이제 그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캠코더 속 자신과 함께 절망할 것인가, 말 것인가.
(이쯤에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과연 내가 삶의 마지막 순간에 떠올릴 가장 아름다운 이미지는 무엇이더냐.)
아론의 사투에 대해 얘기해보자. 그는 절벽 틈새에 127시간 동안 갇혀, 온갖 회상과 상상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그가 했던 최초의 상상, 어쩌면 자기가 갔을지도 모를 스쿠비두 풍선이 이끄는 파티. 가족과의 마지막 연락. 동료와의 마지막 대화. 아론은 고립 초반에 후회과 안타까움으로 뒤범벅된 이미지만을 떠올린다. 지금 내가 어찌해볼 수 없는 것들, 이미 지나간 과거를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랴. 허나, 안타까움은 절망이 되고 절망은 공포를 부르는 법. 그 절망의 정점에는 바로, 스쿠비두가 있었다.(허허..) 우리가 보는 아론의 127시간이 꽤 술술 흘러갔던 것은 그만큼 아론의 심리상태의 흐름이 설득력 있게 흘러갔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희망에 대해. 영화 초중반부에 보여주는 아론의 상상은 거진 아쉬움에 기반한 것들이었다. 그것은 이루지 못했던 일이었거나,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다 차츰 아론은 희망을 연상한다. 여기서 '연상한다'라 표현한 이유는, 희망이 갑자기 불쑥 튀어나온 게 아니라 적당한 의식의 흐름에 따라 차츰 떠올랐기 때문이다. 생애 가장 빛나던 기억들. 사랑하는 가족들. 그리고 모두. 그 제일 끝에 아론의 마지막 상상이 있다. 아이. 언젠가 자신의 아들이 될 한 아이. 그것은 자신이 갖지 못할 미래에 대한 절망이 아닌, 언젠가 가지게 될 희망의 징표로써 다가왔다.
끝으로 영화의 제일 처음으로 돌아와보자. <127시간>의 도입부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여준다. 누구하나 얼굴을 보여주는 일 없이 그저 롱 샷으로 사람의 무리를 비춘다. 일을 하러 가거나 스포츠를 관람하거나, 길을 건너거나 누구를 만나거나. 하루하루 각자의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본격적으로 영화가 시작되면 관객들의 뇌리에서 이내 잊혀질 타인들. 허나, 저 무리 안에 속한 우리들. 보통의 사람들. 그리고 영화는 그들 중 하나인양 주인공인 아론 랠스톤에게 접근한다. 그리곤 들리지 않는 메시지. 이제 보아라. 초인도 천재도 다른 무엇도 아닌 이 사람이 해낸 일을, 보통 사람이 지닐 수 있는 의지와 희망을. 그리고 응원한다.
언젠가 마주치게 될 각자의 바위와의 싸움에서, 혹은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지 않도록.
블로그 :
더 이상의 변화없이 고 상태 고대로.
http://blog.naver.com/mqo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