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까지나 이방인으로 살 수는 없지 않소.” 알베르 카뮈의 희곡 <오해>(1944)에 나오는 얀의 대사다. 어릴 적 집을 떠난 뒤 중년이 되어서야 가족을 찾은 얀은 두둑한 지갑을 내보이며 환대를 기대하지만, 어머니와 누이는 그를 망치로 때려죽인 뒤 수장(水漿)한다. 탕자를 기다리던 건 죽음의 만찬뿐이었다. <귀향>이 <오해>에서 모티브를 얻어 만들어졌다는 점을 감안하면, 루카스의 파국은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양상은 사뭇 다르다. <오해>의 얀이 어머니 앞에서 자신의 어릴 적 이름을 일찌감치 털어놨던들 비극에 휘말리진 않았을 것이다. <귀향>의 루카스가 자신의 한국 이름이 주성찬임을 밝혔다면 어떻게 됐을까. “기억할 수 없는 것과 기억할 것이 없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라고, <귀향>에서 루카스는 말한다. 그에게 과거는 어떻게든 되살려내야 하는 시간이다. 하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다. <오해>의 얀은 떠났고, <귀향>의 루카스는 버려졌다. 얀의 귀향을 가로막은 건 망각이지만, 루카스의 귀환을 방해하는 건 부정(否定)이다. 혈육에게 루카스는 절대로 되살아나선 안되는 존재다. <오해>의 어머니는 비극 앞에서 탄식하지만 <귀향>의 어머니는 광기로 도망친다. 루카스가 과거를 더듬을수록 그의 어머니는 점점 유령으로 변한다.
카뮈는 <오해>의 서문에 이렇게 썼다. “비극적 형식이란 불행의 엉덩이를 발길로 세게 걷어차는 것”이라고. <귀향>의 불행은 비극적 형식으로 해소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소연의 비명이 말해주듯이, 고아수출국이라는 오명은 까마득한 과거가 아니라 여전한 현실이다. 루카스가 배냇저고리의 냄새를 맡으며 희미한 생의 순간을 떠올릴 때 소연은 그 옆방에서 수면제를 삼키고선 피할 수 없는 죽음의 때를 기다린다. <귀향>이 시종 공포영화의 기운을 빌려와 모녀의 여인숙을 채색하는 건 그런 끔찍한 현실 때문일 것이다.
김기덕 감독과 고 김기영 감독의 페르소나였던 박지아와 이화시, 모녀 역을 맡은 두 여배우의 눈빛을 느끼는 것도 좋겠지만, <귀향>에서 가장 돋보이는 건 소연 역의 김예리(<바다쪽으로 한뼘 더> <푸른 강은 흘러라>)다. 루카스와 친모와의 관계를 암시하는 침실장면, 루카스와 소연의 피 묻은 아이를 한데 엮는 장면 등의 비유와 묘사는 직접적이거나 반복적이라 다소 아쉽지만, <귀향>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밀고 나가는 힘이 느껴지는 영화다. 안선경 감독은 연희단 거리패에서 배우, 연출가로 활동한 연극 무대 출신으로 영화아카데미를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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