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버크래커씨의 음침한 집은 파란 잔디가 돋아 있는 교외 주택가에서 얼룩처럼 도드라지는 공간이다. 잿빛으로 때가 묻고 햇빛도 비켜가는 듯한 이 집은 실수로 잔디를 넘어들어온 아이들의 세발자전거와 방패연과 농구공 따위를 삼켜버리고 돌려주지 않는다. 네버크래커씨가 아닌, 그 집 자체가 자신을 침범하는 모든 이를 응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몬스터 하우스>는 제목만으로 짐작하게 되는 <더 혼팅> <폴터가이스트> 같은 ‘귀신들린 집’ 영화와는 조금 다르다. 이 영화의 악당은 45년 전에 네버크래커가 지어올린 뒤로 언제나 숨을 쉬며 살아 있었던 ‘몬스터 하우스’ 자체이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치과의사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집을 비우자 디제이(미첼 무소)는 성격이 나쁜 베이비시터 지(매기 질렌홀)와 이틀을 보내게 된다. 건너편 네버크래커씨(스티븐 부세미) 집에서 일어나는 온갖 사건을 망원경으로 관찰하던 그는 뚱뚱한 친구 차우더의 애원에 못이겨 그 집 잔디밭으로 굴러들어간 농구공을 주우러 경계를 넘고 만다. 흥분해서 쫓아나온 네버크래커는 나뭇가지처럼 억센 손으로 디제이를 쥐고 흔들다가 심장마비로 병원에 실려가고, 그날 밤 그 집은 텅 빈 듯했다. 그러나 디제이는 주인이 없어진 집의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창문에는 붉은 불빛이 비치는 장면을 목격한다. 할로윈 캔디를 팔러온 예쁜 소녀 제니가 네버크래커네 초인종을 눌렀다가 양탄자에 말려 잡아먹힐 뻔하자 디제이와 차우더와 제니는 물총을 들고 몬스터 사냥에 나선다.
<몬스터 하우스>를 제작한 사람은 스티븐 스필버그와 로버트 저메키스다. 80년대에 제각기 <구니스> <백 투 더 퓨처> <로맨싱 스톤> 등을 제작하거나 감독하며 테마파크를 만들기에 좋은 어드벤처영화의 장인으로 군림했던 스필버그와 저메키스는 <캐리비안의 해적: 블랙펄의 저주> 같은 몇몇 영화를 제외하곤 모험의 재미가 사라진 2000년대에 깜찍한 애니메이션으로 복귀했다. 살아 움직이는 생물과 비슷하기는 해도 네버크래커 집은 자그마한 테마파크 혹은 <구니스>의 아이들이 갖가지 트랩을 헤쳐가는 지하통로와 맞먹을 만하다. <몬스터 하우스>가 타깃으로 삼고 있을 아이들은 모르겠지만, 이 애니메이션은 어른들에게는 어느 정도 향수어린 선물이기도 한 것이다. 아이들이 집의 목젖에 해당하는 램프 꾸러미를 끌어당겨 타액 같은 액체와 함께 마당으로 뱉어지는 장면을 보는 어른들은 마이크로 잠수정을 타고 인체를 탐험하는 조 단테의 <이너스페이스>를 떠올리게 될지도 모른다. <레이더스> <인디아나 존스3: 최후의 성전> <폴터가이스트> 등에 일러스트를 제공했던 디자이너 에드 베르와의 솜씨 또한 그런 추억을 부르는 데 큰 몫을 했을 것이다.
영리하고 오락물에 대한 탁월한 감각을 지닌 스필버그와 저메키스는 신인감독 길 캐넌을 기용하여 첨단의 테크놀로지와 생기있는 떠들썩함을 차곡차곡 붙이고 쌓아 바로 길건너이긴 하지만 엄청난 모험의 길을 떠나는 아이들에게 노란 벽돌길을 닦아주었다. 저메키스는 2004년에 이미 3D애니메이션 <폴라 익스프레스>로 배우와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연기를 결합시키는 방법을 터득했으므로, 그 길이 낯설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몬스터 하우스>는 백마탄 공주님처럼 나타난 똑똑하고 야무진 학생회장 제니를 두고 신경전을 벌이는 십대 초반 남자아이들의 능글맞거나 천진한 표정을 퍼포먼스 캡처 방식으로 살아 있는듯 잡아낸다. 퍼포먼스 캡처는 특수한 장치를 몸에 붙여 배우의 연기를 디지털 신호로 옮긴 다음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동작으로 바꾸는 방법. 따라서 실제 배우를 모방하지 않고 애니메이션다운 과장된 얼굴과 육체를 부여받은 캐릭터가 실제 배우만큼 섬세한 연기를 할 수 있게 된다. 낡은 집의 마룻바닥이 솟아오르고 지붕널이 요동치는, 나름대로는 스펙터클한 장면도 영화의 매력이겠지만, 한 시간 반 동안 관객을 잡아둘 수 있는 건 내가 하고 싶은 모험을 대신 해주고 있는 듯한 캐릭터들일 것이다. 로렐과 하디 콤비처럼 우습게만 보이는 디제이와 차우더는 바로 그런 일을 해낸다.
어린이와 십대의 경계에 이른 디제이와 차우더와 제니는 너무 어리지도 않고 너무 커버리지도 않은, “할로윈 데이의 캔디 놀이를 하기엔 너무 나이가 든 것” 아닌가 생각해볼 정도의 나이다. 그런 아이들이 주인공이므로 <몬스터 하우스>는 아이들처럼 쾌활하고 에너지가 있으면서도 적당히 냉소적이고 쓸쓸한, 그렇지만 다시 보면 그저 즐겁게 흘려보낼 수도 있을 인생사를 들려주기도 한다. 악독하다고 오해받았던 네버크래커의 한평생이 그렇다. 아내를 살찌워 잡아먹었다는 괴소문이 나도는 네버크래커는 자기집과 사랑을 나누는 정신병자이자 아이들을 적대하는 괴팍한 노인으로 보이지만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로맨스를 간직하고 있다. 그는 외모도 조건도 따지지 않고 무작정 사랑하기만 하는 헌신적인 연인이었고, 그 사랑의 종말 앞에서 스스로 유쾌한 반전을 가져오는 인물이다. 그가 허허벌판에 홀로 집을 세우던 시절을 회상하는 대목은 세피아빛 번지는 어른스러운 회한을 드라마와 그림 양쪽에서 녹여내고 있다.
픽사가 <토이 스토리>로 테크놀로지의 혁명을 이룬 이래 <파이널 환타지> <다이너소어>를 비롯한 많은 애니메이션은 현실을 얼마나 복제할 수 있을 것인가를 두고 다투어왔다. 그 애니메이션들은 경이로웠지만, 일요일 아침마다 TV 앞에 붙어앉아 만화영화가 시작하기를 기다리던 시절, 가슴 두근거리는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소망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의문을 품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몬스터 하우스>는 더이상 소박하고 평평한 2D에 만족하지 못하는 새로운 세대의 아이들에게 멋진 그림과 함께 멋진 모험 또한 선물해주는 애니메이션이다. <몬스터 하우스>의 아이들은 사람처럼 움직이지만 현실에선 볼 수 없는 모습을 하고 있고, 비현실적인 판타지 속에서 지극히 아이다운 반응을 보여준다. <몬스터 하우스>는 테크놀로지와 드라마와 유희의 정신을 모두 습득하여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우등생과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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