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내가 이 영화에 대해 쪽박을 주는 이유를 말하겠다.
다큐영화지만, 민감한 주제를 다룬 것이니만큼 영화 자체가 지루하거나 하진 않았다.
그러나, 이 영화는 재미를 위한 영화가 아니다. 현실의 문제를 폭로하는 다큐영화의 목적을 기준으로 볼 때,
경계도시는 송교수를 변호하며 이 사회의 허점을 꼬집는 영화로서의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다 판단했기 때문이다.
나는 떠들석했던 당시에는 송교수에 대하여 잘 몰랐고, 영화를 보기위해 뒤늦게나마 당시 사건들을 조금 들춰보았다. 언론에서 말하는 내용과는 또 다른 무언가가 한 개인에게 누명을 씌운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과 기대감으로 영화를 보았다. 그러나 도리어 내가 알게 된 것은 송교수에 대한 최종 재판의 결과(송교수가 노동당관련 김철수라는 주장은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판결)는 사실과 다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다. 최근에 있었던 일련의 받아들이기 힘든 재판결과들과 비슷하게 여겨졌다. 이 영화만으로 모든 것을 확실시 할 수 없는 것은 영화에 나타난 장면들 조차 사실에 대한 조각들의 조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보여준 내용들은 송교수의 측근들이 재판이나 기자회견을 준비하면서 '김철수'로 불린 사실(송교수의 의지와 상관없이, 북측은 그의 신변을 위해 그를 김철수로 불렀던 것으로 보였다)에 대해 인정하는 것과 '(노동당을) 탈당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는 모습을 담고 있었다. 쉽게 말해서, 이 영화는 그가 북측에 소속된 인사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점에 있어, 나는 그가 경계인(남에도 북에도 치우치지 않은 중립적 입장으로서 남북의 화해를 지향)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노동당원은 더이상 경계인일 수 없기 때문이다. 한 기자가 그에게 뼈 아픈 질문했다. '남한을 민주화시키려 노력한 것처럼, 북한을 민주화시키려 해보았는지'를. 물론, 송교수는 측근들과의 회의를 거친후 기자회견을 통해 경계인으로서 중립적이기 보다는 치우친 바가 있었음을 시인한다. 하지만, 공적인 그의 고백들은 대개 자의적 동의된 바이기 보다는 주위 사람들의 주문이었고, 기자회견시의 억지 고백이었다. 실제로 그는 '구속되고서야 자유로운 사고를 할 수 있었다'라고 고백한다. 그의 솔직한 견해가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의 아내의 주장으로 대변되는 확고한 사상은 남한으로 전향(노동당을 탈당하고 남한의 헌법질서를 준수하겠다는 의사표시함)하는 것은 백기를 드는 것이며, 결코 백기를 들 수 없다는 것임을 분명히 한다.
사실 거시적으로 본다면 송교수가 김철수인지, 혹은 노동당원인지는 궁극적인 문제가 아니다. 한 개인에게 적용되는 국가적 판단으로 읽혀지는 우리 사회의 자아상이 어떠한 것인지가 핵심이다. 이 사회는 스스로를 경계자라 칭하고 북측에 소속된 자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 조금 과장해서, 이 사회의 민주주의는 간첩에게까지 관용해야만 하는가. 송교수의 간첩활동여부에 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지만, 이 영화는 자유와 민주주를 내세우며 이 사회가 송교수에게 행한 것들을 비판하고 있기에, 민주주가 말하는 자유의 범위에 대해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이나 다른 유럽이라면 송교수가 자유로운 사상을 말하는 것이나 활동하는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아직 휴전상태의 나라다. 바꾸어 말하면, 아직 북과의 전쟁이 끝이 나지 않는 나라다. 많은 좌파측 사람들은 전쟁에 관해서 전적으로 낙관하고 있고, 송교수는 '나무에 고압전기가 흐르게 했던 사육사가 이제는 전기를 끊어서 원숭이가 나무에 올라갈 수 있게 된 상황(여기서 사육사는 북한을 비유한 것으로 보임)이라서 국보법은 더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지만, 나는 이들의 견해는 불확실한 미래를 너무 쉽게 재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국보법이 오남용되는 것은 고쳐지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아주 쓸모없는 법은 결코 아니라 여겨진다. 전시에 간첩은 아군을 분열시키고, 적에게 문을 열어놓는다. 우리 사회는 만에 하나의 상황을 대비하는 방책을 세워둬야 하는 입장임이 틀림없다. 전쟁은 수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다. 전쟁을 일으킬지도 모르는 적이 여전히 있음에도 무장해제를 외치는 것은 결코 상식적인 자유나 민주주의가 아니다. 민주주는 어디까지나 인간다움을 지키기 위한 도구일 뿐이지,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이 사회의 특수한 상황은 한 개인의 사상이라도 그것이 국가체제를 위협할시에는 그것을 제한할 수 있는 민주주의 형태다. 이것에 대하여 어떤 다른 말로 뒤집고자 하여도, 설득될 수 없다. 그들의 철없는 자유와, 눈 먼 민주주의에 동의할 수 없다.
송교수는 남한에서 9개월의 힘겨운 시간을 보내다 독일로 떠나갔다. 30-40년만에 찾은 고국에서의 시간들이 쓰디썼겠지만, 그는 여기가 북한이 아님을 감사해야할지도 모른다. 북한이었으면 그렇게 사지 멀쩡하게 독일로 돌아갈 수 없었지 않았을까. 오늘짜 인터넷 신문에 화폐개혁을 제안한 북한 인사가 총살형에 처했다고 알려진다는 기사가 난 것을 읽었다. 이런 무시무시한 북한의 실상에 대한 경험이 없는 철모르는 지식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북한의 세력들이 시퍼렇게 살아있는한 이 사회는 경계인을 포용해줄 수 없고, 그들이 거주할 경계도시는 존재하지 않는다.
홍감독은 자신안에 있는 '레드 컴플랙스'와 싸웠다고 기록했지만, 북에 대한 안보의식을 병적 증상을 지칭하는 컴플랙스라는 용어와 결부시키는 것으로 보아서, 국보법을 철폐하기를 바라는 송교수와 동의하는 의사를 지닌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좌파가 보여주는 안보불감증으로 번진 블루 컴플랙스가 아닐까. 덮어놓고 자유와 민주주의를 방패막이로 삼는 것은 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감독에게 말해주고 싶다.
그나저나 이 다큐영화가 부산국제영화제, 서울독립영화제, 한국독림영화협회 등에서 수상했다. 늘 우리 영화를 보면서 느낀 거지만, 우리 영화계는 좌파일색인 것 같아 아쉽다. 곧 노근리사건을 다룬 영화 '작은 연못'이 개봉한다. 이 영화 또한 좌파의 관점을 담았으리라 여겨진다. 나는 내가 놓친 부분이 없는지, 혹은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이 영화를 볼 생각이다. 하지만, 우리 영화계에 좌우에 치우치지 않은 경계인 다운 경계인의 영화가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리 영화계라도 경계도시가 되어주면 좋으련만.
영화 속에 숨어 있는 상징성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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