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소녀가 감당하기엔 너무 힘든 미혼모의 인생은 불행의 시작이다. 그녀 자신이든 그녀가 잉태한 아기에게든. 그 둘의 인생을 조금이나마 편하게 해주기 위해 선택하는 것이 보통 입양이란 형식이지만 그것은 사실 치유를 위한 것이 아닌 ‘봉합’일 뿐이다. 미혼모의 의사도 묻지 않고, 편의적 발상으로, 그들을 보호해주지 않고 그들을 떼어 놓음으로써, 모두가 만족할 것이란 착각이 그 속에 숨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벌어지는 사회의 폭력성도. 영화는 그런 것들을 보여주려는 듯 기묘한 두 개의 서사를 중심으로 영화를 풀어나간다.
하나의 서사는 버림 받은 자가 자신을 버린 어머니를 찾기 위해 먼 곳으로부터 한국을 찾아온다. 영화는 역순행적 구성을 바탕으로 어머니를 찾으려는, 한국말에 서툰, 아들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그와 함께 있는 어느 여인이 등장한다. 그러나 그녀 역시 어느 비극의 시작임을 은연중에 알 것만 같다. 자신을 위해 그 어떤 정보나 흔적도 없다는 사실에 힘들어 하는 입양된, 다 큰 어른은 그런 자신의 처지에 분노하고 비관한다. 자신의 뿌리가 송두리째 뽑힌 한 인간으로서 그는 근원적 존재감조차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 혼자만이 찾아간 어느 모텔은 그의 자궁이자 시작이자 후일 끝이 된다. 그 속엔 자신을 버린 자가 있으니까. 그 모텔에서 만난 어느 여인에 대한 연민과 이상한 친근감, 그리고 시작을 알 수 없는 분노는 영화의 비극을 암시하듯 거칠게 표현된다. 무엇보다 자신을 알지 못하고 있는 두 모녀는 자신의 근원이지만 자신을 외면하는 존재들일 뿐이다. 그러기에 그는 두 번이나 버림받는다.
버린 여인은 버렸다는 사실 때문에 버린 사건 이후 편안한 삶을 포기한 채, 인적 드문 모텔에서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비밀스런 작업으로 살아간다. 그것은 버렸다는 죄책감을 속죄하지 못한 체, 어정쩡하게 살아가고 있으면서, 타인의 목숨을 앗아가는 가엾은 여인이다. 그녀는 자신의 구원을 신에게도 바랄 수 없었고, 그런 구원조차 포기했다. 그녀는 버림 받은 아이를 찾을 수 없는 자신의 당당하지 못한 처지를 용서하지 못한 듯, 혹은 세상에 대한 화풀이를 하듯 무서운 일들을 모텔에서 꾸미고 있었다.
그녀에게 아기는 비현실적인 상상과 망상의 공간 위에 존재했다. 그렇지만 현실의 아들은 거부하는 이중적인 비극을 갖게 된다. 그래서 가혹한 잔인함을 마침내 자신을 찾아온 아들에게도 가한다. 하지만 진정한 비극은 그런 짓을 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 있다는 설정이다. ‘신’에 기대어 해결하려고 하면서도 해결할 수 없었던 그녀는 자신의 폐허가 된 마음 속에 언제나 사로잡혀 아이에 대한 갈망을 하면서도 또 한편 언제나 외면하는 역설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래서 분노의 표현으로 ‘당신 자식이니 당신이 알아서 하십시오.’라고 그녀는 무서운 말을 하늘에게 이야기하며 비극을 더욱 키우듯 아들을 물가에 내던진다.
그러나 그녀가 버린 것은 아들 목숨 하나만이 아니다. 영화의 역순행적 구조를 통해 마지막 장면에서 새로운 생명의 잉태는 그가 왜 자신을 버린 엄마를 찾아야 하는 이유를 엿보게 한다. 어쩌면 그 잉태된 생명만큼은 축복받기를 원했던, 버림받은 자의 간절한 소망이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소망은 원래부터 무시받을 운명이었나 보다. 그와 함께 어머니를 찾았던 여인과 그 여인의 뱃속에 자라나는 또 다른 하나의 생명까지 버림받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스스로 모든 것을 끝내버리는 마지막 불타는 장면은 내면적 Trauma의 해결 없이 모든 것의 극단적 결말만을 보여준다. 용서 받을 수도,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그들에겐 버린 그 순간부터 허락되지 않았던 것이다. 한 번의 관계 단절로 그들은 영원한 관계 단절과 연속되는 외면만 낳고 만 것이다.
‘가족’은 영화에선 언제나 낭만적인 장소로 표현됐다. 그리고 언제나 관객은 그런 것을 원한다. ‘과속스캔들’에서 혼자 사는 남자의 집 한복판으로 들어온 미혼모의 딸과 어린 손자를 자신의 품 속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나, 프랑스 영화인 ‘Papillon (2002)’에서의 새로운 가족 찾기에서 보듯 가족은 언제나 모든 것의 해결점이자 새로운 해결의 시작이다. 그리고 그것이 Happy Ending을 위한 전제였다. 그러나 [귀향]에선 가족이 비극의 시작이자 폭력의 또 다른 모습만을 보여주고 있다. 마치 ‘똥파리(2009)’에서의 가족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점에서 낯선 모습을 보여주는 [귀향]은 그러나 무척 현실적이다. 어쩌면 한국에서 행복한 가족은 영화에나 있을 법한 이상향이 되어 가고 있는 것만 같다. 왜냐 하면 현실의 냉혹성은 그렇게 우리 마음대로 편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영화의 두 번째 서사가 중요하다. 어느 중고생 여학생의 배부른 모습과 그 아이를 죽이려는 시도, 그러면서도 결국 포기할 수 없었지만, 그러나 아기를 세상에 내놓았을 때, 그녀가 원하지 않았지만 결국 자기의 아기를 사회가 억지로 갈라 놓을 때의 무력감과 그녀의 슬픈 독백은 버린 자와 버림받은 자의 불행한 관계의 무한반복을 강렬하게 보여준다. 어쩌면 이 영화는 그런 사회의 폭력성을 제시하는지 모른다. 보호와 재생산을 위해 노력해야 할 사회와 정부가 사실은 우리가 원하고 사랑하는 가족관계를 파멸시키는 원인이자, 원하지 않은 결과물을 어떻게든 은폐하려는 시도를 하려는 ‘괴물’이라는 것을. 그리고 사회는 결국 또 다른 불행의 씨앗을 뿌리고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