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가족사에 등재된 한국 현대사의 비극.. ★★★★
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한명의 개인에겐 어떤 식으로든 그 사회의 역사가 등재되어 있다. 최근에 본 애니메이션 중 가장 인상 깊었던 <페르세폴리스>는 이러한 명제를 적나라하게 실재화시켜 보여준다. 같은 차원에서 <할매꽃>에선 한 가족사에 등재된 참혹했던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감독인 문정현은 평생 정신병으로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의 이상한 일기로부터 시작해 외가에 어린 슬픈 가족사에 대한 진실과 마주대하게 된다. 그 중심에 고령의 외할머니가 있다. 빨치산으로 산 속에 있다 외할머니의 권유로 자수를 한 외할아버지의 존재, 형님 면회를 위해 지서를 찾았던 남동생(작은 외할아버지)은 빨갱이로 몰려 고문을 당하고, 고문 후유증으로 평생 정신병에 시달린다. 스스로를 자해하고 가족들에게 폭력을 행사한 작은 외할아버지의 레드 콤플렉스는 평생 어떤 빨간색도 가까이 하지 못한 채 결국 스스로를 해침으로서 고단했던 일생을 마감한다.
그로 인해 평생 죄책감에 시달린 외할머니의 고통은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같은 동네의 아는 경찰에게 부탁해 좌익 운동을 하던 오빠를 자수시켰으나 그 경찰은 지서에 도착하기도 전에 오빠를 즉결 처형해 버리고, 식민지 시절 일본에 갔다가 고국으로 돌아오려던 남동생은 그 소식을 듣고는 일본에 남아 조총련의 열혈 활동가가 되었다. 그런데 정말 큰 고통은 오빠를 죽인 경찰의 딸과 문정현 감독 어머니는 친구 사이라는 것이다. 감독의 외할머니와 어머니는 오빠가 죽은 사연을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않고 가슴에 담아 두고는 오빠 또는 외삼촌을 죽인 원수의 가족과 웃으며 대해 왔다. 두려움으로 인해. 그리고 그러한 두려움은 지금까지도 가슴 깊숙한 곳에 남아 있어 카메라와 감독의 질문 앞에 자주 멈칫 거린다.
해방 및 한국전쟁 시기의 좌우익 대립은 전 한반도에 깊은 상처를 남겨 놓았다. 우익이 점령한 곳에서는 좌익을 상대로 한, 좌익이 지배한 곳에서는 우익을 상대로 한 피비린내 나는 복수극이 펼쳐졌다. 그런데 <할미꽃>을 보면 이러한 참극이 단순히 이념적 대립으로만 전개된 건 아니었다. 감독의 외가가 있는 곳은 전라남도 나주시 반남면 일대다. 반남면은 한국 고대사 최고의 미스테리라 일컬어지는 그 유명한 반남고분이 있는 곳이고, 반남 박씨의 본가인 곳이다. 이곳에 상대, 중대, 풍동 마을이 서로 마주보고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이곳 마을 주민들의 서로에 대한 반목은 대단히 뿌리가 깊다. 상대와 중대마을은 예로부터 양반들이 주로 살았다고 하고, 원래 하대 마을이었던 풍동은 상민이 주로 살았다고 한다. 식민지 시대에 들어와 지식인이 많았던 상대와 중대마을에서는 좌익 사상을 많이 받아 들였고, 해방 이후까지 이어졌지만, 일찍 교회가 들어온 풍동마을은 교회의 영향 때문인지 우익 진영에 가담해 마을간 대립은 단순한 이념적 대립이 아니라 계급 대립의 성격까지 내포하고 있었다. 묘한 건 봉건시대 지배계층인 상대, 중대 마을이 좌익 계열인 반면 피지배계층인 봉동마을이 우익 계열이었다는 사실이다. 왠지 역사적 아이러니라는 생각이 든다.
외할머니 일가의 비극은 단지 한반도에서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일본에 남은 남동생으로도 이어진다. 활발한 활동으로 조총련 도쿄 지부장까지 오른 남동생은 박정희 정권의 체제 선전에 이용당하는 바람에 조총련에서도 배척당하는 신세가 된다. 그리고 딸을 북한에 보냈다는 이유로 다른 가족들로부터도 버림받은 그는 혼자 죽음을 맞았지만, 그의 아들은 아직도 아버지를 용서하지 못한다. (아들을 북에 보내고선 평생 그 아들 뒷바라지를 하는 <디어 평양>의 아버지가 떠오른다.)
세상에 이런 기구한 가족사가 어디 있을까 마는 우리네 어르신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이 좁은 한반도에서 작든 크든, 고난의 세월을 보내지 않은 집안은 없을 정도로 어찌 보면 흔한 얘기다. 지리산을 중심으로 빨치산 활동이 활발했던 전라도 지역이 특히 심한 것 아니냐는 의문이 생길 수도 있지만, 좌우익에 의한 집단 학살은 특정 지역에 국한된 얘기는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 다큐멘터리에서 가끔 드러나는 감독의 자의식 - 아버지, 어머니에게 국가보안법에 대한 견해를 물어보는 장면이라든지 - 은 과잉된 듯 느껴지고, 특히 어머니에게 외삼촌을 죽인 경찰의 딸인 친구와 연락해서 만나보라는 거듭된 요구는 강박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물론, 그러한 개인적 차원의 해소, 화해가 전혀 의미 없는 건 아니지만, 그건 과정을 카메라에 담고 싶은 욕심으로 인해 과도하게 밀어 붙이는 건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독이 “수고하셨어요. 다음 생에선 편히 사세요”라고 병상에 누워 있는 외할머니의 귀에 속삭일 때, 흔들리는 카메라처럼 나의 마음도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뿌리 깊은 반목과 대립은 언제쯤이나 사라질 수 있을까? 어떤 계기로 사라질까? 아니면 그저 시간이 흘러 잊어지는 걸 기대하는 게 현실적인 것일까? “나는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신이 의견을 주장할 권리를 위해 싸우겠다”(볼테르) 이런 외침이 아직 우리에겐 너무 사치스런 말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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