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과 유머로 찾아가는 오르가즘.... ★★★
<헤드윅>의 감독 존 카메론 미첼의 2006년 작 <숏버스>는 한국에서 극장에 걸리기 위해 무려 2년 동안의 논란을 헤쳐 나와야 했다. 한 번도 오르가즘을 느껴본 적이 없는 섹스 상담가 소피아(숙인 리)의 오르가즘으로 가는 여정을 그린 이 영화가 처음 논란이 된 건 배우의 실제 정사, 자위, 집단 섹스 장면 때문이었다. 거기에 영상물등급위원회의 ‘제한상영가’ 등급판정과 이에 반발한 수입사 측의 소송으로 인해 논란은 더욱 거세졌고, 그만큼의 홍보 효과를 올렸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2년 동안 이 영화가 일반 한국 극장에서 상영되지 않았던 건 아니다. 영등위의 ‘제한상영가’ 판정과 관계없이 부산국제영화제 등의 각종 영화제 초청작 형식으로 상영되었고, 다운로드 파일의 범람으로 사실 볼 사람들은 다 봤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는 현실이다. 모자이크된 화면, 그럼에도 극장에 그럭저럭 관객이 들어찬 걸 보니, <숏버스>를 큰 화면으로 보고 싶은 욕망(!)은 상당했나 보다. 나 역시 그랬으니깐.
영화는 2년 동안의 논란이 입증하듯 초반부터 장난 아닌 장면들이 연이어 나온다. 제임스의 애크로바틱한 자위, 남성 동성애, 소피아 부부의 격렬한 섹스, 세버린의 SM 등이 연이어 초반부를 강타한다. 그리고는 카메라는 영화의 주무대인 ‘숏버스’의 내부로 이동한다. 영화 제목인 <숏버스>는 장애가 있는 학생들이 이용하는 짧은 버스를 의미한다고 한다. 그러니깐 숏버스 클럽은 알고 보면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의 빈 곳을 메우는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한다.(장애 하나 없는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실제 정사 장면은 일단 논외로 놓고 보면, <숏버스>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다지 독특하다거나 새롭다거나 또는 새로운 주제인 것은 아니다. 그간 많은 영화들이 제기한 자유로운 섹스를 통한 구원 또는 해방, 상대방과의 진정한 소통, 자신과 타인을 속이던 성정체성의 확립, 허위를 벗어던진 솔직함 등등, 표현 방식의 격렬함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영화는 아니란 얘기다. 아마도 <숏버스>를 그럴듯하게 만든 그저 그런 포르노라는 비판은 이 때문일 것이다.
물론 나는 <숏버스>가 포르노라는 비판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오래 전에 떠돌던 ‘예술영화와 외설영화의 차이’라는 유머가 기억나서 찾아보니 이런 내용이다. 첫째, 보고 나서 눈물이 나면 예술, 군침이 돌면 외설, 둘째, 애인과 같이 보면 예술, 친구와 함께 보면 외설, 셋째, 보고 마음의 변화가 생기면 예술, 몸의 변화가 생기면 외설, 넷째, 처음부터 다시 보면 예술, 주요 부분만 다시 보면 외설, 다섯째, 전체 화면이 뿌옇게 처리되면 예술, 부분만 뿌옇게 처리되면 외설, 여섯째, 비디오를 빌려줘서 돌아오면 예술, 안 돌아오면 외설, 일곱째, 주말의 명화에 나오면 예술, 다섯 개 만원씩이면 외설, 여덟째, 장면이 생각나면 예술, 제목만 생각나면 외설, 아홉째, 감동이 상반신으로 오르면 예술, 하반신으로 오르면 외설이라는 것이다. 장난스럽긴 하지만 이 기준에 의하자면 <숏버스>는 예술영화와 외설영화의 경계선에 걸쳐 있는 것 같다. 그럼에도 영화와 포르노의 차이가 포르노는 실제로 하고 영화는 실제로 하지 않는다는 일반적인 정의를 무너트린 건 사실이다.(이 영화 말고도 실제로 정사를 한 다른 영화가 있기는 하지만)
그런데 일반적으로 노출이 심한 영화라면 느껴지는 끈적끈적하거나 진득한 느낌이 이 영화엔 없다. 너무 노골적이라서 기피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숏버스>의 전반적인 느낌은 의외로 유쾌하고 발랄하고 귀여우며, 유머가 넘친다. 그러다보니 보면서 야하다는 생각도 별로 들지 않는다. 게다가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른다는(?) Yo La Tengo가 맡은 음악은 영화의 외설적 분위기를 경쾌한 느낌으로 탈바꿈시켜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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