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글을 쓰게 된 동기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tigercat님의 글을 읽으면서 그렇게 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똑같은 장면을 저도 봤고, 200만이 넘는 다른 관객분들도 보셨는데 저도 그렇고 다른분들도 대체로 님이 언급하신 장면에서 별로 불쾌감을 느끼지는 않은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저를 포함한 200만은 님이 언급한 일련의 학대행위들에 대해서 도덕적 눈을 감아버린 것인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를 통한 최대한의 감동이라는 목적지로 가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좀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자기기만이 될테니까요. 그리고 살짝 억울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느낀 감동의 위신이 실추되었기때문이죠. 제 감정의 명예를 회복시켜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고민해보았고 그 고민의 과정을 적어보게 되었습니다.
tigercat님의 주장은 크게 2가지로 나뉘는것같습니다.
1. 할아버지는 소와의 관계에 있어서 '소'와 '자신'을 미련할정도로 학대하는데 이것은 보편적 가치관인 휴머니즘에 위배되며 따라서 바람직한 우정의 관계로 보이지 않는다.(그렇게 하지 않고도 충분히 우정을 쌓아나갈 수 있다.)
2. 할아버지는 소와의 관계에 있어서 소만 바라보고 소만 생각한 나머지 자신은 물론 할머니(여기서 할머니는 관계를 맺고있는 두 축의 외부자 즉 제 3자를 대표한다고 보겠습니다.)까지 학대에 가까운 수준으로 괴롭히고 있다.
1번에 대한 생각 :
할아버지가 자신을 학대한다는 주장에 대한 입장에는 할아버지의 행동을 학대로 보느냐 보지 않느냐에 따라 두 가지 경우의 수가 나올 것 같은데요. 첫째, 한 발 물러나서 님의 생각을 받아들여 할아버지가 자신에게 하는 행동을 학대라고 인정한다고해도 이에 대해서 관객이 옳으니 그르니 판단할 자격은 없다고 봅니다. 상식적 도덕관에 비추어보아도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는 것이 아닌 행동을 나무라기는 힘들기 때문이며, 오히려 이 판단의 밑에 깔려있는 우월함에 젖은 시선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둘째, 개인적으로는 할아버지의 행동을 자학이라고 보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할아버지에게 있어서 농사일은 할아버지 삶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그렇기에 농사일을 하는 것은 할아버지의 살아있음을 존엄하게 증명해나가는 과정이라고 봅니다. 그 숭고한 목적을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신체에 어느정도의 고통을 주는 것은 할아버지 입장에서는 전혀 학대가 아니겠죠.
할아버지가 소를 학대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할아버지에게 있어 소는 일종의 분신이며 일심동체적 존재'임을 상기하면 충분히 반론이 된다고 봅니다. 소가 할아버지의 분신과도 같은 지위를 갖는 이유는 다들 아시다시피 할아버지가 소에게 40년간 쏟아온 정성(구체적인 예로는 새벽에 일어나서 짚으로 죽쒀서 먹이고 소 먹을 짚단을 베러 아픈 다리를 끌고 기어서 산을 타는것 등이 있겠죠.) 그리고 소가 40년간 할아버지에게 바친 헌신 때문입니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바친 정성과 헌신으로 인해 소는 할아버지의 분신이 된것이며 둘은 일심동체가 된것이죠. 따라서 소에게도 할아버지 삶의 전부인 농사일은 매우 중요한 것이며 소의 경우 할아버지의 농사일에 수단으로 종속됨으로써 자신의 삶을 존엄하게 증명해나가는 것입니다. 이 와중에 할아버지가 소에게 가하는 고통은 할아버지가 자신에게 가하는 고통이 학대가 아닌 이유와 같은 이유에서 학대라고 보기 힘듭니다.
2번에 대한 생각(1번내용도 포괄) :
tigercat님은 상당히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사고를 하시는 것 같습니다. 즉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않는 선에서 적당한 균형감각을 유지하면서도 할아버지와 소는 충분히 우정을 쌓아갈 수 있었다. 이런 말씀이신듯 합니다만. 진정한 의미의 우정 혹은 '유대'라는 것이 그러한 합리적 사고 혹은 행동으로부터 연유되기에는 좀 특이한 성격의 것이라고 봅니다.
물론 그러한것으로부터 어느정도 유대관계가 이루어질수 있겠습니다만 그 유대의 백그라운드는 어떤것이냐가 문제겠죠. 인류는 문명이 발달할수록 공리주의적인 윤리관, 즉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지향하는 윤리관, 또한 사회안정에 기여하므로 가치를 인정받는 도구적이며 관습화된 윤리관, 어찌보면 매우 계산적이고 수치적인 윤리관을 확립시켰고, 님이 언급하신 조건을 충족시키면서 얻는 유대라는 것은 언급한 계산적 합리적 윤리관을 백그라운드로 하며 그렇기에 '진정한 유대'라는 것의 본질에는 닿기 힘들다고 봅니다.
따라서 영화 워낭소리가 보여주는 할아버지와 소의 유대가 독보적으로 아름다워보이며 수많은 관객들의 눈시울을 자극했던 이유는 오히려 님이 안좋게 보셨던 부분으로 인한것이라 생각합니다. 즉 할아버지와 소의 유대관계가 기존 공리주의적 윤리관의 대척적인 위치에서 가지게 되는 투박하고 맹목적이며 원시적인성격 때문이라 봅니다. 할아버지의 행동은 님이 언급하신바대로 비계산적이며 어떻게 보면 미련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대상이외의 것에 대해서는 무감각한 이기주의적인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기에 할아버지와 소의 관계는 생명과 생명사이에의 원초적이며 순수한 유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관객들은 이를 보며, 문명화되면서 인류가 망각하고 있었던 순수한 일대일의 유대, 즉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상대방만 바라보는 진정한 유대라는 것을 기억의 밑바닥으로부터 끄집어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인류문명이 배설해놓은 피상적인 유대관계와 그로인한 온전한 의사소통의 불능이라는 난제에 대한 문제의식이 반대급부로서 거의 필연적으로 관객들의 의식 혹은 무의식중에 뒤따를 것입니다. 의식화해낸 관객은 워낭소리에서 해결의 단초도 찾을 수 있다고 봅니다.
이것으로 제 고민의 전 과정을 다 적었습니다. 대부분의 관객들이 tigercat님이 언급한 장면에서 불쾌한 감정을 갖지 않은 것은 도덕적 눈을 감았기 때문이 아닌듯 합니다. 단순하게 보면, 피학 혹은 자학으로 보이는 장면의 밑바닥에 깔려있는 '할아버지와 소의 진정한 유대'를 무의식중에 혹은 의식중에 인지했기 때문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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