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체류자의 고단한 삶과 엄마 찾아 일주일....★★★★
극장에서 예고편을 보고는 <언더 더 쎄임 문>이 그저 <엄마 찾아 삼만리> 류의 착한 영화일 거라고만 생각했다. 물론, 악인이 거의 등장하지 않을 정도로 이 영화는 착하다. 그리고 어린 카를리토스가 멕시코에서 LA까지 엄마를 찾아가는 여정은 애달고 슬픈 감정을 불러일으키지만, 눈물겨운 드라마보다는 오히려 미국의 멕시코 불법체류자의 고단한 삶을 통해, 미국의 이민 정책을 고발하는 사회물로서 더 큰 파장을 끼친다.
LA에서 가정부로 일하는 엄마는 일주일에 한 번, 일요일 오전 10시에 공중전화로 전화를 걸어온다. 카를리토스가 제일 기다리는 시간. 그러나 엄마와 아들은 헤어진 지 4년, 그들의 그리움은 점점 더 깊어만 간다. 자신을 돌봐주던 할머니가 잠에서 깨어나지 않자 카를리토스는 엄마를 찾아 미국으로 향한다. 엄마가 일요일 10시에 전화하는 곳은 LA 동부의 벽화와 피자가게, 그리고 세탁방과 버스 정류장이 있는 곳. 월요일에 집을 나선 카를리토스는 엄마가 전화를 하기 전에 엄마를 찾아야 한다.
일단 가난한 아이가 엄마를 찾아 나서는 이야기로만 볼 때, 이 영화는 전형적인 경로를 밟아 나간다. 까다로운 멕시코-미국 국경을 간신히 넘어, 돈이 떨어지면서 첫 번째 위기를 맞지만, 그곳에서 불법체류자들을 보호하는 중년 여성의 도움으로 일차 위기를 극복하고, 이들과 함께 이동하지만 토마토 농장에서 일하는 도중에 이민국의 급습을 받는다. 작은 몸집 때문에 다행히 잡히지 않은 카를리토스는 엔리케라는 동반자를 만나 긴 동행의 여정으로 들어선다. 식당에서 일을 하며 차비를 모으고, 친 아빠를 만나는 등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이 둘은 드디어 LA에 도착하지만 도대체 엄마가 전화하는 장소를 찾을 수가 없다. 이건 마치 서울에서 김서방네 찾기 정도가 아닐까? 하지만 염려마시라. 이런 착한 영화가 비극으로 끝날 일은 없으니깐.
이 영화가 착하다는 건 일단 등장인물 대부분이 착하다는 것이다. 다들 어려운 사정이라 어린 아이 하나쯤 속여서 돈을 챙길 만도 한데, 언감생심 그런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는 착한 어른들만 모인 드림 월드가 펼쳐진다. 물론 아이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어른이 나타나기도 하며 그걸 극복하면서 성장해 간다. 대표적으로 친아빠. 그러나 친 아빠도 나쁜 놈이라기보다는 책임감 없는 나약한 인간일 뿐이고, 그저 먹고 살기에 바쁜 서민일 뿐이다. 그런 아빠를 대신해 엔리케는 사실상의 아버지 역할을 한다. 고생을 하며 엄마를 찾아 나선 카를리토스는 갑자기 자기와 떨어져 살고 있는 엄마가 못내 야속해 지고 미워진다. 화를 내는 카를리토스에게 엔리케는 말한다. “누구라도 그러고 싶어서 그렇게 하는 사람은 없어. 모두 이유가 있는 거야”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 영화엔 불법체류자의 고단한 삶과 미국의 이민정책에 대한 비판이 깔려 있다. 그리고 그런 부분이 전형적인 ‘엄마 찾아 삼만리’ 식의 드라마보다는(물론 드라마가 부실하다는 건 아니다. 드라마만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한 몫을 한다) 이 영화가 더 가치 있음을 증명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들은 항시 이민국의 급습에 대비해 마음 졸여야 하고, 불법 해고를 당하고 임금을 떼이면서도 불법 체류자라는 신분 때문에 조용히 물러서야 한다. 이거 혹시 멕시코-미국 얘기가 아니라, 한국 얘기 아닌가 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우리에게도 익숙한 모습이다.
영화에선 불법체류자의 삶과 미국의 이민 정책을 직접적이거나 노골적으로 비판하지는 않는다. 대신에 이들은 노래로 이야기를 한다. 시종일관 흘러나오는 멕시코 노래의 가사는 어떤 부분에선 날카롭고, 어떤 부분에선 감성을 자극한다. 그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노래는 자신들의 처지를 슈퍼맨과 비교한 노래였다. 토마토 농장에서 흘러나온 그 노래의 가사를 기억을 되살려 대충 더듬어보면, ‘슈퍼맨도 불법체류자다. 그런데 어떻게 슈퍼맨은 근사한 직장에서 근사한 양복을 입고 근무를 하고 있는 것인가. 자신들은 항상 쫓기고 불안해하며 도망 다니는데, 왜 슈퍼맨은 다른 대우를 받는가? 그저 백인이라서?’ 정말 기막힌 풍자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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