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통속적인 이야기, 그러나 눈물짓게 만드는 힘...
한 남자가 너무나 헌신적이고 순수한 그녀와 사랑을 하다가 배반한다. 배반당한 여자는 곧 죽을지도 모를 불쌍한 여자다. 이 정도 되면,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 무수히 많은 드라마들이 떠오른다. 배반당한 불쌍한 여자에 관한 이야기. "당신, 부숴 버릴 거야" 드라마라면 어찌어찌하여 살아나게 된 여자의 처절한 복수극(대게는 남자의 사업을 망하게 하는 것)을 그리겠지만, <8월의 크리스마스>로 시작된 허진호 감독에게 그런 가파르고 뾰족한 정서란 애당초 없을 것이다.
환락과 쾌락에 젖어 살던 영수(황정민)는 간경변이라는 진단을 받고 살기 위해 요양소에 들어간다. 그는 이곳에서 폐병환자 은희(임수정)의 도움을 받아 서서히 요양소의 삶에 적응해 나간다. 영화 속 영수의 대사처럼 은희는 전혀 아프지 않은 사람 같다. 그러나 현실에서도 그렇지만, 아픔을 표현하지 않는 사람의 아픔이 더 아픈 법이어서, 남몰래 삭이는 은희의 아픔은 '꺾꺾'대는 소리와 함께 관객의 심장을 적신다.
가벼운 투닥거림과 소근거림으로 둘의 사랑은 시작되고, 영수와 은희는 별도의 집을 구해 서로를 간호하며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그러나 병에서 먼저 회복한 영수를 도시의 불빛은 유혹하기 시작한다. 안타깝게 들렸던 은희의 아픈 소리는 이제 영수의 짜증을 유발하고, 평화롭던 시골 풍경은 이제 그에겐 무료함일 뿐이다. 이미 마음이 떠난 영수, 몸이 떠날 차례다. "니가 날 먼저 떠나주면 안 되겠니?" 사랑은 끝이 났지만, 그 끝이 남긴 상처가 똑같은 건 아니다.
바로 사랑을 시작한 연인들은 정열적이다. 그리고 자신이 상대를 더 사랑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왜 너는 나만큼 너를 생각하지 않느냐며 따지고, 토라진다. 그런데 그런 정열적인 순간이 나에게 지나가면 아직도 정열적인 상대의 사랑이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너는 왜 아직도 어린애 같니?" 영수와 은희가 그랬다. 영수의 병과 사랑은 분명히 은희의 병과 사랑보다 깊지 못했다. 그래서 사랑의 끝이 남긴 상처도 누구에겐 그저 환락에 취해 간경변이 다시 도진 정도지만, 누구에게는 목숨을 걸 정도의 아픔을 남겨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흥미로운 건, 영화의 주제가 제시되어야 할 후반부가 마치 2배속 버튼을 누른 것처럼 훌쩍 훌쩍 건너뛰는 반면, 초반부 - 둘의 사랑이 시작하는 단계에 오히려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눈길을 끈다는 점이다. 이 부분은 마치 <8월의 크리스마스>를 연상하게도 하는데,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둘의 투닥거림과 소근거림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정말 연인처럼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두 남녀가 서서히 다가서는 모습을 그리는 게 허진호 감독의 특기가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행복>은 너무나 통속적인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보는 관객을 눈물짓게 만드는 힘이 있으며, 이는 허진호 감독의 연출력과 아름다운 영상의 힘도 크지만, 황정민과 임수정의 디테일한 연기에 힘입은 바 크다. 행복과 근심이 자주 교차하는 둘의 연기를 음미하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히 값어치가 있다고 할 수 있는데, 특히 몸빼를 입어도 임수정은 이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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