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머니. 감독이 그랬을까? 이 영화를 이 땅의 모든 외할머니에게 바친다고... 영화의 자막이 올라갈 때 나는 나의 외할머니를 떠올렸다. 십 년도 더 전에 돌아가신 기억도 희미한, 나의 어머니의 어머니. 그리고 망사 양말에 얽힌 나의 어린 시절.
내가 겨우 초등학교 1학년 정도였을 때였는데, 언니와 나는 방학을 맞아 오랜만에 서울 외할머니 댁을 찾아갔다. 그 날 아침 언니와 양말을 가지고 티격태격하던 나는 엄마의 호통을 피해 흰 레이스가 달린, 이미 늘어날 대로 늘어난 싸구려 망사양말을 신고 갈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도착한 다음날 아침 일찍 어딘가를 다녀오신 외할머니는 우리에게 시장에서 사오신 검정 비닐봉지에 든 양말 두 켤레를 내어 주셨다. 어린 기억에도 한 겨울에 망사양말을 신은 발이 부끄러웠다.
정이 무언지도 잘 모르던 나이에 나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모두를 잃었다. 한식날마다 어린 동생을 업은 엄마와 천안에 있는 두 분의 산소를 찾던 기억이 아직도 희미하게 남아있다. 그곳에 가면 황토색 흙먼지를 날리는 구부러진 길을 따라서 조화를 파는 장사들이 있었고 엄마가 그 조화를 한아름 사 나에게 들리면 나는 동생을 업은 엄마를 따라 수많은 산소자리 중 둘을 찾아가곤 했던 것이다. 너무나 너무나 서럽게 우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따라 울곤 했던 것이다.
철이 들고서 가끔 그 망사양말을 보던 외할머니의 눈길을 어렴풋이 기억해냈다. 철이 들고서야 그 눈길에 담겨 있던 애잔함을 기억해냈다. 시집보낸 딸의, 자주 만날 수도 없이 바쁘게 사는 딸의 고달픈 하루 하루가 그 망사양말에 담겨있는 듯 외할머니는 내 발을 보셨을 게다. 그리고 그 눈길이 철든 내 가슴에 멍처럼 남았을 게다.
처음 <집으로...>, 이 영화의 광고를 봤을 때 나는 반신반의했다. 이 영화, 보고 싶다. 그런데 이 영화가 흥행할 수 있을까? 그것이 바로 이 영화에 대한 나의 생각이었다. 얼마 후 이 영화는 시도 때도 없는 기사와 광고로 나의 반신반의를 잠재웠다. 사람들의 대열에 합류한 나는 영화가 개봉한 지도 한참 지나서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저녁도 거른 채 영화관으로 직행하여 미리 예매한 표를 교환하고 음료수 하나만을 가방에 넣은 다음 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 옛날 내 망사양말처럼 아이는 외할머니라 이름지어진 산골 어느 할머니에게 맡겨진다. 도대체 수화 같지 않은 수화를 하는 할머니는 거칠고 굳은살 박인 몸에 구부러질 대로 구부러진 허리로 힘겹게 그러나 은근히 아이의 가슴을 쓰다듬는다.
사랑은, 진실한 가슴에서 우러난 사랑은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오랜만에 눈물을 흘렸다. 여기 저기서 훌쩍이는 소리도 거슬리지 않았다. '보고십다', '아프다'를 가르치는 아이의 속 깊은 배려는 처음에 그가 보여 주었던 얄미운 마음들을 돌려놓았다. 버스에 올랐던 아이가 다시 내려 자신이 가장 아끼던 로봇 카드를 할머니의 주머니에 대뜸 넣을 때는 주변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더욱 커졌다. 사랑은 그런 거였다. 소중한 것보다 더욱 소중해지는 마음. 내 안에서 흰 망사양말 대신 그 옛날 외할머니의 밤색 양말이 문득 떠오르고 있었다. 외할머니가 내게 주었던 따뜻한 기억들이 하나 둘 떠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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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hee65
옛날 외할머니의 밤색 양말이 문득 떠오르고 있었다. 외할머니가 내게 주었던 따뜻한 기억들이 하나 둘 떠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