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인정'적인 면에서 본다면,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존중한다'라는 말이, 얼마나 무섭고 또 잔인한 말인지... 이러한 자세를 가진 사람들의 이중적인 면모를, 섣부르게 지적해 버린다면 선의의 제스쳐를 취하고 있는 이들의 모습에서, 나의 비난은 충분히 인정받지 못한다. 아니, 잘해주려고 하는데 왜그러느냐는 식으로 오히려 역습...을 당해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몰이해의 존중'이 '절대적인 윤리방식'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묵묵히 그리고 (어쩌면) 미소까지 듬뿍 담긴 '물이해의 존중人'들이 내미는 손에는 '따뜻하지 못한 인정'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을 보는 시각에는, 어쩔 수 없이 타인들을 층계지을 수밖에 없는 죄...가 있다. 다시말해 '절대적이고 불가항력적인 죄악'이라는 것인데, 이것은 인간이 가진 '양심'의 이중성이 그 근저에서 중요한 작용을 한다. 물론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회적인 계층'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최대한 사회적인 면을 제외하고 남은, 불순한 수준의 '인간성'을 논의하고 있으며, 그렇기에 앞에서 말한 계층은 '인간적인 계층'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불순한'이란 용어를 사용한 것은, 그 인간성의 척도가 되는 '양심'이 완벽히 '탈사회적'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영화는, 참 질리게도 '섹스'의 장면을 보내준다. 하지만 그 장면들에서 사람들은 왠만해서는 '성적인 자극'을 받지 못한다. 왜냐하면 영화를 보게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앞에서 말한 인간적인 계층에서 '평범'이라는 표지판을 달고 있는 영역에 있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영화의 '섹스'는 결코 평범치 않다. 그것은 '동성애'자들의 이야기기 때문이다.
동성애자를 다룬 이야기의 영화는 많으면서도 또한 '유명하다'. 이유는 소재의 '충격성'에 있으며, 또다른 이유는 그 소재를 다룬 영화의 '서정성'에 있다. 즉, 동성애라는 비윤리적인 소재를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으니, '영화계'라는 측면에서는 어쩔 수 없이 유명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동성애의 본질은 둘째치고 그것의 '충격성'만 도마에 올려놓은채, '서정성'으로 맛있게 양념을 해놨으니 '유명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동성애'라는 것 자체는 쓰레기통에 처박힌다.
앞에서 적은 문장을 각문한다면, '영화는 참 질리게도 동성애자의 섹스 장면을 많이도 적나라하게 보내준다.' 그런데 보는 사람들은 그 장면에 공감(자극받기)하지 못하며, (내 장담하는데) 오히려 역겨움을 느낄 수 있다. 앞에서 말한 '양심'의 작용이다. 낯설음과 그리고 어딘가에서 충분히 존재감을 증명하고 있는 양심의 당연한 명령인 것이다. 덕분에 '영화'와 '관람자(평범)' 사이에는 벽이 생기게 되고, 그 벽은 또한 영화의 주인공들에게도 높게 드리워져서, 그들에게 '일탈'과 '자살'을 강요한다.
영화의 주인공들은 벽을 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불안감, 그런데 한참은 높기만한 벽 사이에서 갈등한다. 그리고 노력한다. 그런데 노력하다 안되니 타협하려고도 하며, 오히려 자신을 부정하려고도 하고, 자신의 존재를 말살하려고 까지 한다. 주인공들의 이러한 노력은, 영화의 동성애자의 섹스 장면 만큼이나 많이 표현되고, 실질적으로 영화가 내고자 하는 높은 목소리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영화를 벗어나서 더 넓은 곳, 즉 현실에서도, 자신들의 목소리가 들리기를 바란 것 같다. 그래서 이 영화는 기존의 영화들처럼, '동성애를 다루지만 결코 아름답지 않다'. 아름답고 추한 미학의 영역을 애초에 거부해 버린 듯 싶다. 이러한 특징을 알아챈 지금, 그들의 목소리가 조금은 들리는 듯 싶다. 자기들도 많이 힘들다...라고.
이제 앞에서 논한 것들을 마무리 해야겠다. 적어도 동성애를 용납지 못하는 면에서, 선하지만 악할 수 밖에 없는 이중성의 '양심'은 앞에서 말한 '죄'의 영역을 벗어날 수 없는 듯 싶다1). 두가지의 의미로서의 '간접 살인'의 근거를 지고 있는 것이랄까. 그 양심을 가진자의 시각들이 주는 압박 가운데서 자살을 하는 것이라는 하나의 의미와, 그 양심을 가진자가 마음속으로 그 타인에 대한 업신여김이라는 또다른 의미로서 말이다.
앞에서 말한 '몰이해의 존중'이 왜 윤리적이지 못한가라는 이유를 드는데 있어서 하나 빠뜨린 것은, '사회적인 갈등을 회피하려는 비겁한 자세'라는 지적이다. 몰이해의 존중에는 '인간이 없다'. 차라리 기계가 낫다라고 느끼는 것은 비단, 자살을 시도했던 영화의 주인공의 비디오카메라에 대한 집착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2).
'많이 힘든' 자신들의 삶. 그 고된 일상의 자화상의 이유가 나 자신의 '선한(적어도 그렇다고 믿어온) 마음'에 있었다면, 충분히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내가 당신을 죽여왔다니, 이만큼 충격적인 사실이 또 어딨을까. 그렇기에 동성애자의 섹스 장면이라는, 개인적으로 충격적인 경험(물론 한국영화의 '로드무비'에서 본적이 있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앞에서 설명한 '서정성'의 측면이었다)을 하면서도 영화에서 한번도 눈을 떼지 않았고, 지금 이렇게 (적어도 한량한 시간이기 때문이었기도 하지만) 몇 자, 악필로도 끄적이고 있다. 다만 바라는 것은, 이 제스쳐들이 '몰이해'로 비춰지지 않았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1)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절대적인 인간성의 존중의 측면에서 보는 것인데, 기실 인간성의 존중이라는 개념 자체가 근대에서 생겨난 것이므로, 적어도 '양심'이 가지는 '악한 면', 즉, '나쁜 사람'이라고 타인을 몰아부치는 것 만큼은, 최근에 생겨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영화의 남자 주인공이 자신의 모습과 동성애의 모습을 화면에 담고, 또 그것을 유서로 남기고 자살을 시도하는 것은,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호기심을 또한 가지는 사회에 대한 소극적인 저항으로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 비디오카메라는 동물원의 우리에 다름아니게 된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유일하게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비디오 카메라에서, 타인들에 대한 욕구를 대리만족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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