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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꾼 파수꾼
andrew1130 2008-01-04 오전 2:16:52 992   [3]
 

 


1991년 9월 본에 위치한 주독 프랑스 대사관. 본은 1990년 10월 3일 동서독이 통일이 되기 전까지 서독(독일 연방 공화국)의 임시수도였다. 영화는 1992년에 제작되었는데, 통일이 되고 1년 뒤를 시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대사는 싱글 숏으로 이야기를 한다. 얄타 회담이 있기 전, 처칠과 스탈린이 가진 비밀야합의 추악함을 고발하는 듯 하다. 얄타 회담은 독일의 분리, 동유럽의 공산화에 기여했다고 평가되는 회담이다. 독일은 우리나라와 비슷하게 연합국에 의해 강제 분단되었다. 독일에 대항한 레지스탕스와 수많은 생명을 앗아간 수용소의 일은 마치 옛날의 꿈처럼 지나가고, 이제 폐허가 된 유럽은 연합국의 땅따먹기 전장이 돼버렸다. 전쟁의 공포에서 해방된 기분도 잠시, 유럽에는 냉전의 차가운 기운이 감돌고, 전쟁의 포화 속에 있었던 수백만의 운명은 연합국에 의해 좌지우지된다. 전쟁 못지않은 악몽이 전개되고 있던 것이다. 각 나라 국민의 자유의지는 거세된 채,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 중 한 가지를 선택하기를 강요받는다. 아니 선택의 자유도 없이, 점령과 동시에 지배된다. 유럽이라는 대륙은 여러 나라들이 적은 면적을 차지하며 인접해 있는 형세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전쟁이 터지면 유럽 전체가 전쟁의 포화에 휩싸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작은 분란과 갈등도 커다란 문제로 번질 수 있고, 전쟁야욕은 매우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독일에 의한 2차 세계대전은 그러한 지형적 조건이 가진 위험성이 극대화된 전쟁이다. 무사히 2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난다. 그러나 재건과 평화를 기원하는 바램과 달리,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냉전의 시대가 도래하고, 유럽을 갈기갈기 찢어놓는다. 이제 유럽의 각 나라는 가깝고도 먼 나라가 된다. 국경을 사이로 인접해 있지만, 서로 다른 체제를 구축하고 언제든지 잡아먹으려고 으르렁대고 있는 것이다. 독일은 베를린 장벽을 사이에 두고, 냉전의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한 최전선이었다. 그런 독일이 다행히도 통일을 이루어냈다. 그러나 아직도 유럽의 분리는 여전하고, 나라 간 경계도 삼엄하다. 아르노는 이러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유럽 통합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하나의 통합체가 형성된다면 전쟁의 위협도 냉전의 기운도 감돌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거대한 독립체로 어떠한 외세의 영향도 받지 않고, 주체적으로 결정하고, 문제를 해결해나갈 수 있다. 앉아있는 마시아스 뒤에서 뛰어노는 소녀들이 목발을 짚은 소년처럼 불행을 겪지 않기 위해서는 대사가 하고 있는 역사의 뒷이야기가 되풀이 돼서는 안 될 것이다. 


대사의 말소리는 소녀들이 수풀에서 뛰어나오는 모습 위에서 들리다가, 대사의 싱글 숏이 이어진다. 이후 앉아있는 마시아스와 그 뒤에서 노는 소녀들 숏, 절름발이 소년과 어머니들, 뛰어가는 소녀들의 숏, 강을 바라보다가 뒤돌아서는 마시아스 숏으로 이어지고, 다시 대사의 싱글 숏으로 돌아온다.(처칠이 종이를 집어 들었다는 대목에서 컷해 붉은 표지의 책을 가리키고 있는 대사의 손을 비추다가 틸 업해 대사의 싱글 숏이 된다. 얼핏 단순히 종이와 책의 연관성을 생각해 볼 수 있겠으나, 정확히 왜 대사가 책을 가리키고 카메라는 이를 비추는지 정확히 이유를 알 수 없다. 추측으로  붉은 책이 얄타 회담 내용을 담은 책은 아닌가 싶다) 문제는 대사의 이야기가 계속되는 가운데, 왜 대사관 앞의 야외 장면을 교차했는가? 이다. 대사관 밖과 대사관 내부, 이 둘은 동시간대에 진행되는가? 아니면 다른 시간대에 진행되는가? 관습적으로 교차 편집은 화면분할 프레임 구성이 아닌 이상, 동시간대에 각기 다른 장소에서 일어난 일을 교차해 보여준다. 한 화면만 잡을 수 있는 카메라의 한계 상 나온 기법이다. 그러나 순차적으로 화면들이 나열되고, 교차된 사건들이 일분일초라도 어긋나지 않고 동시에 진행된다는 것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즉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제시되는 화면들은 동시성을 확보하지는 못한다. 영화 설정 상 일부러 교차되는 각 화면에 똑같은 시간을 제시하지 않는 이상 말이다. 교차 편집에서 이러한 설정 없이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을 제시한 경우는 본 적이 없다. 프레임 분할 말고 영화언어로서 방법을 찾을 수 있다면 흥미로울 것 같다. 세례식과 살인 장면을 교차 편집한 대부를 예로 들어보자.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장면들이 교차돼 나열되고, 한 장면이 흐르는 동안 제시되지 않은 다른 장면은 멈춰있지 않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진행되고 있다. 즉 동시에 벌어진 두 가지 사건을 쭉 찍어놓고, 이 사건들이 진행된 시간의 선상에서 이 둘을 나눠 붙인 꼴이다. 달리 말하면, 화면에 비치지 않는 외 화면에서도 화면과 동시에 일이 진행되고 있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화면과 외 화면을 서로 교차해 편집하는 것도 가능하다. 꼭 멀리 떨어진 장소가 같은 공간에서 카메라의 두 가지 선택에 의해 교차편집이 가능하다. 이렇게 되면 대화 장면의 두 인물을 각각 따로 잡는 것도 일종의 교차편집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교차편집 하나의 시간의 흐름을 하나의 장면이 아닌 상이한 장면으로 채워나가고 있다. 그러나 대화 장면처럼 같은 공간에서의 교차편집은 시간을 단축하거나 시간에 잉여가 발생하지 않는 반면, 다른 두 장소에서 일어나는 일의 교차편집은 실제적인 시간의 흐름 속에서 실시간으로 진행된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두 사건이 같은 공간에 위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같은 공간에 일어나는 일을(인간의 시야와 청각에도 한계가 있어 같은 공간이라도 모든 것을 감지한다고 볼 수는 없다) 실제의 시간 흐름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시간의 실제성을 보장한다.(같은 공간의 편집에서도 시간 조작은 가능하나, 조작을 하게 되면 자연스러움이 떨어지고, 영화라는 매체의 인위성이 드러난다) 찍히는 동안은 실시간이고, 시간의 조작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반면, 다른 장소의 교차편집은 편집이라는 요소가 들어가며, 시간 조작이 가능해진다. 여기서는 실시간 개념이 각기 다른 장소의 편집으로 인해 이에 대한 관객의 인식이 약해지기 때문에, 시간 조작을 해도 인위적이지 않다. 관객은 각기 다른 장소의 일을 실세계에서 동시에 경험할 수 없는 것도 실시간 개념에 대한 인식을 불가능하게 하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다. 실시간 개념이 사라지므로 당연히 시간을 자유자재로 늘리기도 줄이기도 할 수 있다. 관객은 대부의 교차편집에서 세례식을 하는 미사장면의 시간과 살인 장면 시간이 같은 선상의 흐름이라는 것에 신경 쓰지 않는다. 즉 미사장면 다음에 이어지는 살인 장면의 시간이 미사장면의 시간의 흐름에서 정확하게 이어지는 시간이어야 한다는 것에 무감하다는 것이다. 두 사건이 동시간대에 진행되고, 둘이 서로 연관이 있음을 인지하는 정도다. 시한폭탄과 이를 막으려는 영웅의 교차편집에서 시한폭탄이 10초를 남겨뒀다고 해서, 꼭 시한폭탄이 실시간으로 정확히 10초 후에 터질 필요가 없고, 영웅이 이를 막기 위해 달려오는 장면을 10초 이상을 보여줘도 상관이 없는 것처럼, 극의 진행과 효율성에 따라 시간을 조작한다. 그러나 한 화면의 사운드가 교차되는 다른 화면에서도 계속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제 한 화면의 시간이 다른 화면의 시간이 된다. 둘은 같은 시간의 흐름을 공유하고, 그 정확성을 사운드의 겹침이 증명한다. 마치 같은 공간에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 실세계에서는 불가능한 사운드의 겹침을 영화에서는 해내고 있고, 동시에 다른 장소에서 일어난 일을 한 화면에서 보여줄 수 없는 한계를 사운드가 해결하고 있는 것이다. 화면분할이나 합성도 동시성을 가능하게 하지만, 이렇게 하면 화면은 실세계의 화면과 거리가 멀어진다. 물론 사운드도 겹쳐놓으면 실세계의 사운드는 아니나, 영상보다는 부자연스러움이 덜하다. 사운드를 여러 트랙에 걸쳐 사용할 수 있다는 테크놀로지의 발전은 현실계의 한계를 넘어선 영화세계를 창조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대사의 말소리가 신호가 되어 영화는 한 호흡의 실시간으로 진행되게 되고, 사운드 소스가 등장하지 않는 대사관 밖 풍경도 대사관 내부와 같은 시간의 흐름에 놓인다. 마치 내화면 사운드만 듣다가 외화면 사운드도 듣는 꼴이다. 만약 대사관 밖 풍경에서 대사의 목소리가 없다면, 관객은 화면이 이 풍경을 보여주는 동안, 대사관 내부에서는 대사가 계속 말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내 화면에서 외화면의 일들을 상상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정확한 실시간의 개념은 사라지고, 다시 대사관 내부로 돌아올 때, 대사는 실제 시간의 흐름에서 내뱉은 말보다 앞의 말이나 뒤의 말을 해도 무방하다. 아니 이런 논의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관객은 중간에 대사가 보이지 않는 동안 그가 무슨 말들을 했는지 알 수 없고, 어떤 흐름이었는지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운드를 겹쳐주어서 대사관 내부의 상황이 마치 외화면에서 동시에 진행되는 일처럼 인식되게 한다면, 관객은 대사관 내부의 상황을 사운드를 통해 실시간으로 정확하게 인식하고, 실제 시간의 흐름에 둘을 놓기 때문에, 조작된 영화세계가 아닌 실세계를 대하는 기분을 가지게 된다. 마시아스가 강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대사는 이런 말을 내뱉고, 절름발이 아이(전쟁과 냉전의 분리와 갈등으로 상처받은 유럽을 시사하는 건 아닐까?)가 걸어가는 동안, 대사는 저런 말을 했다는 것을 아는 것은 관객에게는 현실에서는 맛볼 수 없는 진기한 체험이면서도, 실제 인간이 감각의 한계로 지각하지 못할 뿐이지, 실세계에서는 실제로 벌어지는 일들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시야에서는 불가능한 천리안 같은 초능력이면서, 인간의 한계로 인한 주관성과 제한성을 초월한 객관적 실세계 제시를 가능하게 한다. 마치 신이 하늘에서 지구의 곳곳을 한 시야에 동시에 바라보는 것과 같다. 인간 시야와 청각의 한계, 카메라 사각 프레임의 한계를 극복해 마치 초고속 카메라로 실재하지만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꽃의 개화를 볼 수 있듯이, 영화의 기술과 그 활용은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실제 세계의 모습에 더욱 근접해 다가가려 하는 시도를 가능하게 한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면, 이러한 사운드의 겹침은 두 공간을 한 공간처럼 여겨지게 함으로써, 두 공간에서의 일이 서로 무관하지 않고 밀접하게 연관이 있음을 암시한다. 이러한 사운드의 겹침이 자연스러운 장면을 예로 들면, 부부가 창 밖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며 대화를 나누는 설정이 있다. 두 공간이 떨어져있더라도 부부가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두 공간은 부부의 시야에서 같은 공간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대사관 밖 풍경이 대사의 시점 숏이 아니다. 이 두 공간의 일을 인위적으로 묶으려는 의도가 다분하다고 볼 수 있다. 연합국의 횡포에 의한 유럽의 분리와 갈등, 이에 대한 비판과 통합에 대한 갈망을 담은 대사의 이야기는 그의 목소리에 겹쳐 영상으로 비치는 마시아스를 포획하고 그의 행동을 예견한다. 그리고 이 사운드를 통해 대사관 내부가 대사관 외부의 영상을 종속시키고, 대상화한다는 느낌을 준다. 그런데 영화의 중반부, 마리가 노래 연습하는 장면과 마시아스가 머리에서 조직을 채취해 연구를 하는 장면이 교차되는 대목에서 이와 비슷한 사운드의 사용이 이뤄진다. 마시아스가 연구를 하는 이미지는 마리의 노래 소리로 인해 이전 장면에 종속된다. 그러나 이 두 장면은 동시간대에 일어난 일이 아니다. 그녀의 노래 소리는 마시아스의 연구실에서까지 흘러나와 마치 배경 음악과 같은 기능을 한다. 그렇게 보니, 대사의 목소리도 대사관 외부의 장면에서 배경 효과음 같은 기능을 한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떠오른다. 배경 음악과 배경 효과음은 그 장면을 설명하고,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등 이미지에 보조적인 역할을 하곤 한다. 이전 장면에서는 현실음인 대사의 목소리와 마리의 노래 소리는 다음 장면에서 비디제시스 배경음이 되어, 이미지에 힘을 보태어 주는 기능을 한다고 볼 수 있다. 각기 다른 장면의 사운드와 이미지의 융합. 이것이 어떤 효과를 낳는지는 고민해볼 문제다. 마리의 노래와 마시아스의 연구가 동시간대가 아닌 이유는 마시아스가 마리의 연습실에서 마리의 노래를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시아스의 연구는 마리의 노래 연습 장면보다 이전이거나 이후인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두 장면의 시간이 어느 게 먼저냐가 아니다. 두 장면이 인관관계로 묶여져 있는 것도 아니므로 어느 장면이 시간적으로 우선이냐는 중요치 않다. 마시아스가 몰래 머리를 조사하고 연구하는 행위 자체가 극적이고, 그의 심리변화를 이야기하는 것이므로, 음악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볼 수 있고, 마시아스가 누나인 마리와의 관계에서 이 일을 숨기고 있지만, 누나의 사운드가 겹치는 이 장면에서 마치 누나가 마시아스의 일을 지켜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대사의 목소리도 마찬가지다. 겉으로 보기에 마시아스는 누나의 연습실도 찾아가 누나가 어떻게 지내는지 알 수 있고, 반면 마리는 마시아스가 사는 공간을 방문한 적이 없다. 극중 인물 중 아무도 마시아스가 사는 호텔에 들른 사람은 없고, 윌리엄과 함께 아파트에 살아도, 서로의 영역을 간섭하지 않기로 한다.(물론 영화 후반부에 윌리엄이 머리의 존재를 눈치 채고 마시아스의 방에 들어와 그가 무슨 책을 읽는지 보고, 나중에는 그의 방을 뒤집어엎어 놓기는 하지만 말이다) 마시아스의 공간은 철저히 다른 사람들에게 은폐되어 있고, 오직 관객에게만 노출된다. 그러나 대사의 사운드와 마리의 사운드가 마시아스의 영상 위에 겹쳐질 때, 관객은 마시아스가 주위의 시선과 감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한다. 여기서 사운드에 의한 재밌는 드라마틱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마시아스의 영상 위에 엎어진 대사와 마리의 사운드는 마시아스가 인지하지 못하는 부분이나, 관객은 마치 신과 같은 전지적 시점에서 이 사운드를 마시아스가 움직이는 가운데, 듣고 있는 것이다. 다르게 생각해보면, 영화는 마시아스의 1인칭 시점으로 대부분 진행된다. 몇몇 대목, 그가 등장하지 않는 장면이 있긴 하다. 예를 들어, 대사가 이야기하는 장면, 마리가 노래하는 장면, 한 남자가 나탈리의 집을 뒤지고 나탈리를 죽이는 장면, 브라셸이 죽은 윌리엄을 태우는 장면이 있다. 마리의 노래하는 장면에는 마시아스의 모습이 비치지 않는다. 그리고 마시아스의 연구실 장면이 이어지면서, 관객은 둘이 이 시간대에 같은 공간에 있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마리의 노래가 끝나고 다른 여자가 노래를 하는 장면에서 마시아스가 연습실에 있었고, 마라의 노래를 듣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마리가 노래하는 장면에 마시아스는 있었다는 결론으로 앞의 주장을 번복해야 한다. 그렇다면 마시아스가 연구하는 장면에 마리의 노래가 흘러나오는 설정을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다. 마시아스의 연구 장면은 마시아스가 마리의 연습실을 방문한 후에 일어난 일이라고, 즉 마리의 연습실 장면은 마시아스의 과거 회상 또는 현재 연구실 장면 이전의 과거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이를 뒷받침할 만한 증거가 있다. 마시아스가 머리에서 조직을 채취하는 장면에서 피아노 음악이 선행되고, 컷하며 마리의 연습실 장면이 이어진다. 이대로 마리의 연습실 장면이 계속된다면, 연구실 장면이 이전이고 연습실 장면이 이후인 순차적 시간 흐름에 따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연구실 장면으로 다시 이어진다. 숏의 순서상, 과거 회상 기법을 떠올려 봤을 때, 과거회상 또는 과거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다만 특이하게도 과거의 사운드가 현재 연구실 장면에도 들린다는 점이다. 보통 회상에서 과거 사운드가 현재 사운드에 들릴 때는 인물의 기억에 들리는 사운드 심상으로 여겨, 에코 처리를 하는 방식으로 인물의 기억에 내재한 사운드임을 표시하는데, 이 영화는 특이하게도 지금 일어나는 일처럼 사운드를 있는 그대로 얹어놓는다. 그렇다면 마시아스는 마리와의 연습실에서의 일을 기억 속에 생생히 기억하고 있고, 연구하는 와중에도 머리 속에는 그 일이 맴돌고 있는 것인가? 마리와의 연습실에서의 대화가 그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고, 그래서 그가 머리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 것이라는 인과 관계가 성립된다면, 영화적으로 이를 표현하는 방법이 마시아스의 과거회상보다는(여기에는 인물의 주관적인 선택과 배제, 객관성이 떨어지는 과거가 될 것이다) 객관적인 있는 그대로의 과거를 보여주는 것이 관객으로 하여금 이들의 상황과 장면 나열의 관계를 객관적으로 인지하고 동시에 더욱 동시적인 사운드의 겹침으로 마시아스의 행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게 한다. 마리의 장면이 마시아스의 과거회상인지, 연구실 장면 이전의 과거인지가 중요해졌다. 앞에서 제시한 근거와 연구실 장면에서 다시 마리의 연습실 장면으로 이어지고, 다시 연구실 장면으로 돌아가지 않고, 마리의 연습실에서 씬이 끝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과거 회상이라면 연구실 장면에서 끝을 맺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는 마시아스의 과거회상이 아닌 객관적 과거의 제시이다. 그리고 연습실 장면에서 마리의 노래보다 중요한 것은 마리와 마시아스가 나누는 대화이다.(연구실 장면에서 마리의 노래가 끝나고, 잠시 휴식했다가 다른 여자의 노래가 이어지며, 연습실 장면으로 컷하는 것을 생각해보라. 거울로 다른 여자가 노래하는 것이 비치고, 거울 앞에 앉은 마시아스에게 마리가 프레임 인 해 둘의 대화가 시작된다. 이 대화가 중요하기 때문에 연구실 장면에서 이 대화가 시작되기 전에 컷한 것이다. 노래가 끝나 잠시 조용한 동안 연구실에 마시아스 외의 두 사람이 존재하고 이들의 목소리와 움직이는 사운드 등이 부각되어 들린다. 노래 소리가 들리는 동안도 연구실의 기계음이나 마시아스의 손 움직임에 의한 소리가 들리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노래 소리에 지배돼, 묻히는 느낌이었다. 노래가 끝나자 연구실의 사운드 소스가 보이는 현실음이 부각되고, 그 현실음이 부각되도록 사람들을 등장시켜 말을 시킨다. 노래 소리가 진행되는 동안은 연습실에 있는 것 같은 환상에 있다가 노래가 끝나며 현실로 돌아오는 느낌을 준다. 그리고 다른 여자의 노래 소리가 다시 시작되며 화면은 컷한다. 연습실의 사운드와 연구실 사운드의 대비에서 연습실 사운드를 주로 두고, 정작 영상이 나오는 연구실의 사운드는 그 밑에 두어, 연습실 사운드가 줄 때, 연구실 사운드가 부각되게 한다. 연구실 장면이 연습실 장면에 지배받는다는 느낌을 주는 중요한 증거이다) 이 대화가 이전 장면의 마시아스의 연구시작에 영향을 준다. 그러므로 이 대화 장면으로 끝을 맺고, 한 시퀀스가 끝난다. 이 장면 후에 ‘ambassador' 시퀀스가 새로 시작된다는 점을 유의하자. 이 장면이 한 시퀀스에서 한 시퀀스로의 전환을 가져오게 하는 중요한 터닝 포인트 지점인 것이다. 이 대화 이후에 그 영향을 받은 마시아스의 행위는 실천에 불과하다. 결정적인 원인 제공은 이 대화에 있으므로, 이 장면이 연구 장면보다 이전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끝을 맺는다. 연구실에서 마라의 노래가 흘러나오는 것은 이 과거의 일이 현재의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의미한다. 자 그렇다면 같은 사운드 운용을 한 대사관 내부와 대사관 외부의 교차편집에서 대사관에서 대사가 누군가에게 (처음에는 싱글 숏으로만 보이다가 카메라가 빠지며 대사의 이야기를 듣는 남자의 뒷모습을 비추는 걸 보면 인터뷰 같기도 하다) 이야기하는 장면은 대사관 외부의 장면보다 과거일 수 있다는 가정을 해본다. 연구실과 연습실의 교차와 그 구성이 같기 때문이다. 대사관 외부의 장면을 먼저 보여주고, 거기에 대사의 목소리가 얹혀지며, 대사관 내부 대사의 장면으로 넘어간다. 그 다음으로 타이틀 자막이 뜨고, 대사관 외부 장면이 3컷 이어진다. 그리고 다시 대사관 내부로 돌아와 여기서 끝을 맺는다. 대사관 외부 장면 3컷과 연구실 장면 5컷을 비교해보자. 비록 컷 개수는 다르나, 연구실 장면의 기계로 포를 뜨고, 물에 담가 채취하는 과정의 3컷은 같은 범주의 한 컷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리고 대사관 내부로 돌아가기 전의 숏과 연습실로 돌아가기 전의 숏은 둘 다 마시아스의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과거를 비추기 전에 현재의 마시아스를 비춤으로써, 과거와 현재의 그를 연결시키는 효과를 일으킨다. 그리고 대사관 내부의 첫 장면에는 대사만 보여주다가 두 번째 장면에는 그 주변의 인물들을 컷으로 보여주고, 트랙 아웃으로도 보여준다. 마리의 연습실도 마찬가지다. 첫 숏에서는 마리와 피아노 연주자만 보여주다가 두 번째 숏에서는 거울에 비친 다른 가수와 거울 앞에 앉아있는 마시아스의 존재도 비친다. 이러한 가정에 따르면, 마시아스는 대사가 이야기하는 자리에 있었어야 한다. 그러나 대사관 내부에 마시아스는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마리 연습실과 다른 점이다. 이 대목이 대사관 내부가 외부에 비해 과거라는 가정을 흔들리게 하는 지점이다. 보이진 않더라도 그 자리에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으나, 이는 억지스런 합리화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대사관 내부 장면 마지막에 자크로 보이는 뒷모습의 남자가 화면에서 멀어지고 있다. 이 남자가 마시아스라고 한다면 과거 회상이라는 가정에 더욱 힘이 실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남자는 명백히 자크이다. 이 다음이 아버지 무덤 앞에서의 마시아스와 어머니의 모습이고, 마시아스가 자크가 기다리고 있다고 말하는 대목과 그 전 장면에 자크가 문을 향해 가는 모습을 생각해보면, 대사가 대사관 내부에서 말하는 동안 이미 택시를 타고 도착한 마시아스가 함께 떠나기 위해 자크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두 장면은 동시간대에 진행된다고 말이다. 암튼 이 부분은 다각도로 해석이 되면서 이상한 장면들이다. 위에 언급한 두 가지 교차편집과 사운드의 겹침을 선택한 이유로 효율성을 이야기할 수 있다. 대사관 장면 안팎이 동시간대에 진행된 것이라고 가정하고 이야기를 시작하면 대사의 대사는 영화의 전체와 연관이 있는 중요한 부분이므로 하나라도 빠트려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동시에 일어나는 대사관 안과 밖의 상황을 담기 위해, 교차편집을 사용하는 데 있어, 문제가 발생한다. 대사관 밖으로 전환하면 대사의 이야기가 들리지 않아야 한다는 거다. 판타지 영화가 아닌 이상, 이것이 일반적으로 영화가 고수하는 리얼리티이다. 그러나 그 이야기가 중요하다면, 방법은 그 리얼리티를 깨고 대사관 밖의 사운드에 대사관 내부의 사운드를 겹쳐놓는 것이다. 아르노는 과감히 이러한 방법을 선택했다. 무엇이 더욱 중요한가를 알기 때문이다. 반면, 대사관 내부의 장면을 외부의 과거라고 가정한다면, 순차적으로 대사관 내부의 상황을 먼저 다 보여주고, 그 후에 대사관 외부의 장면을 제시하는 것이 일반적인 편집이다. 하지만 미학적인 관점에서 대사의 이야기가 마시아스와 연관이 있다고 한다면, 순차적으로 나열하는 방법은 둘의 연관성을 제시할 수 없다. 마시아스의 모습 위에 대사의 사운드를 겹쳐놓아야만 가능하다. 보통 시나리오 상에서 두 인물이 마주치고 대화를 나누는 식의 상황설정을 활용하는데, 숏과 숏의 이어붙임, 한 장면에 다른 맥락의 사운드가 침범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이는 이미지와 사운드로 이뤄진 영화의 테크놀로지를 활용한 좋은 예이다. 서로 다른 이미지와 사운드의 겹침으로 이질적인 장면과 숏의 소통과 융합을 이뤄낸 것이다. 시간의 효율이라는 측면에서도 순차적으로 제시하는 방법에 비해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 대사의 싱글 숏을 롱 테이크로 비추고 있다고 상상해보라. 그 장면에서 중요한 건 대사의 모습이 아니라 그가 하는 말들이다. 말들은 빠짐없이 다 담아야하지만, 영상은 굳이 다 담을 필요가 없다. 롱 테이크로 말하는 장면을 다 담으면 배우가 연기하기도 힘들고, 경직된 화면 때문에 관객이 지루해하며, 이러한 지루함을 없애기 위해 감독이 불필요하게 배우를 움직이게 하거나 카메라를 움직이는 등 불필요한 STAGING을 설정해야 한다. 소모적이고 재미없을 수 있는 장면을 교차편집과 사운드의 겹침으로 훌륭하게 가공했다. 마리의 노래 연습과 마시아스의 연구의 교차편집과 사운드의 겹침도 같은 이유에서 기발한 아이디어이다. 멀리 돌아왔는데, 다시 일인칭 시점과 마시아스가 등장하지 않는 장면에 대해 이야기해보면, 마리가 노래 부르는 장면에는 마시아스가 있었고, 대사가 말하는 장면은 대사의 이야기가 마시아스를 비추는 숏에서도 흘러나오므로 마시아스가 등장하지 않는 장면의 논의에서 제외시키자. 비록 마시아스가 대사의 목소리를 듣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관객은 듣고 있기 때문이다. 일인칭 시점의 주안점은 관객도 주인공이 보고 들은 만큼만 보고 듣는다는 것인데, 마시아스를 비추고 대사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장면에서는 이런 법칙이 깨진다.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관객은 마시아스를 따라가며 그에 대한 정보와 비밀을 알지만, 그를 둘러싼 윌리암, 자크, 필리페 등 외무부에서 일하는 인물들에 대한 정보는 마시아스가 그들과 만날 때만 드러날 뿐, 사생활이나 비밀, 생각은 드러나지 않는다. 이러한 그들의 은폐성과 그들이 마시아스를 감시한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 영화는 일인칭 시점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마시아스가 자기 방에서 연구실에서 생각하고 고민하는 동안, 다른 인물들은 다른 공간에서 분명 무슨 생각을 하겠지만, 일인칭 시점 방식으로 인해 영화상에서 그것이 드러나지 않는다. 이런 방식은 스파이, 은폐와 감시라는 영화의 소재와 맞닿아있고, 관객은 마시아스를 따라다니며, 모호하고 속내를 알 수 없는 다른 인물들에 대해 무지해 답답함을 느끼고 경계심을 가진다. 마시아스의 심리상태에 동화되는 것이다. 대사와 마리는 마시아스의 숏에 그들의 목소리를 들려줌으로써, 앞에 언급한 인물들과 달리 오픈 되어 있는 느낌을 준다. 영화는 전체적으로 이렇게 흘러간다. 그러나 필리페와 윌리암의 명령을 받은 듯 한 남자가 나탈리 집을 뒤지고, 나탈리를 죽이는 장면과 브라셀이 죽은 윌리암을 태우는 장면에는 마시아스가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의 전체적인 원칙을 깬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는 불가피한 이유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마시아스는 잡혀 있기에, 나탈리 집에 갈 수 없고, 그 장면을 목격할 수도 없다. 시나리오의 전개와 개연성을 고려해, 마시아스가 나탈리 집에 있게 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고 이 원칙 때문에, 이 장면을 생략할 수는 없다. 이 장면이 생략되면, 윌리암, 필리페, 자크라는 인물의 본심이 드러나지 않고, 마시아스가 윌리암을 죽이는 다 다음 장면으로 이어질 수 없다. 관객이 납득하지 못하는 것이다. 나탈리가 죽은 후 차 안에서 머리를 찾은 윌리암과 마시아스가 대화하는 장면에서 자기 방에 턱뼈가 있다고 거기로 가자고 하는 마시아스의 잠깐 비치는 뒷모습에서 살기를 예감할 수 있다. 여기서 마시아스가 나탈리의 죽음을 알고 있는지 모르는지는 알 수 없다. 그것을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 뒤의 마시아스의 행동이 달라지는데, 그것과 상관없이 나탈리가 살해된 장면을 앞에 배치하여 관객은 심정적으로 마시아스의 윌리암 살해에 동의하게 된다. 또한 지금까지 윌리암과 자크가 나탈리를 대하는 태도는 가식적이고, 이용을 하는 느낌이 강하다. 나탈리에게도 문제가 있지만, 윌리암은 친구인 자크의 여자친구인 나탈리와 섹스를 한다. 그런데 자크는 옆의 동료와의 대화에서 나탈리와의 관계에 있어 심각하지 않고 그녀를 가볍게 여긴다는 것이 드러난다. 스쿼시를 하는 운동센터에서 마시아스가 보고 있는 가운데, 한 여자와 키스하고 그녀와 결혼할 거라고 이야기한다. 윌리암과 나탈리와의 관계에 대해 윌리암에게 잠시 화낼 뿐, 마시아스가 신상정보를 알려주는 기관에서 가져온 봉투를 내밀며 마시아스에게 화살을 돌린다. 이러한 그들의 나탈리에 대한 태도, 그리고 윌리암이 머리가 나탈리 집에 있냐고 묻는 대목에서 이들이 나탈리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것을 마시아스가 예상할 수 있다. 그러므로 불가피하게 이 장면을 넣어야 하고, 또한 반드시 넣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동안 은폐되어 있던 윌리암, 필리페, 자크의 본색이 드러나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마시아스의 시점에서는 가려져있던 그들의 본색이 마시아스가 보지 못하는 다른 공간에서 드러난다. 이렇듯 영화후반부로 갈수록 이들의 본색은 조금씩 드러나고, 남자가 나탈리를 죽이는 장면에서 절정을 이룬다. 윌리암은 마시아스가 머리를 숨기는 사물함이 있는 곳으로 몰래 쫓아오고, 마시아스의 방을 어지럽히며, 자크는 어떻게 알았는지, 마시아스가 시체에 대한 신원 조회한 사실을 알아내, 그 봉투를 손에 넣는다. 그리고 친절하던 윌리암이 마시아스를 때리고, 필리페가 마시아스에게 자기들의 뜻을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이들의 속내가 드러난다. 이들은 무언가를 은폐하고 마시아스를 몰래 감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영화에 드러나지 않지만, 결과적으로 이들의 행동에서 그것을 유추할 수 있다. 그래서 이들의 본색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살해 장면은 더욱 이펙트가 강하다. 감춰진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의 충격을 둔기를 맞은 것처럼 강하게 하기 위해, 마시아스의 일인칭 시점으로 쭉 진행되다가, 이 장면에서 3인칭 시점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관객은 이 장면을 보고 알지만, 마시아스는 못 보았기에 모를 거라는 드라마틱 아이러니가 형성되지만, 앞에서 언급했듯, 지금까지 마시아스가 윌리암과 자크, 필리페를 접한 경험과 나탈리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그녀의 집에 남자가 침입해 머리를 얻어왔다는 정황으로 미루어 마시아스도 예측하고 있을 것이다. 아니면 윌리암을 통해서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이런 정보를 얻었을 것이다. 이들의 본색과 의도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판에 마시아스는 망설일 것이 없다. 그 다음 브라셀이 윌리암의 시체를 태우는 장면에서도 마시아스가 없는 3인칭 시점인데, 마시아스에게 있어 브라셀도 베일 속 인물이고, 관객에게도 마찬가지다. 이 장면이 그가 구체적으로 무슨 일들을 하는지, 무슨 의도로 마시아스에게 접근했는지 그 속내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로써, 마시아스와 관객에게 베일로 가려져 있던 외무부 인물들과 브라셀 (스파이)의 모습이 3인칭 시점 사용으로 드러난다. 은폐와 노출을 시점의 변화로 이뤄낸 경우다. 윌리암을 죽이고, 마시아스는 수장 격인 필리페에게 숨기지 말고 본색을 밝히라고 야유를 퍼붓는다. 러시아에 있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노예로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의 필리페에 대한 야유는 필리페 일당이 은폐했던 본색이 드러나는 전 과정으로 인해 설득력을 가진다. 가면을 꼭꼭 쓰고 있는 모습에 대해 답답함과 분노를 느끼던 관객도 마시아스를 따라 가면을 벗으라고 소리치고 싶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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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small
글쿤요   
2010-03-14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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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꾼(1992, The Sentinel / La Sentinel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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