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 미니츠”
개인적으로 클래식에 관한 지식이
A4용지 두께만큼이나 얄팍하기에
더구나
나지도 않은 흰 머리를 굳이 찾아 뽑을 정도로 지루하다는
일부 평들의 부담 백배 심리적 윽박질 때문에
꼭 봐야 할 늙으신 농촌 부모님을 위한 한풀이 효도잔치격 맞선도 아니고
고고하든 고상하든 어차피 가벼운 인생
그냥 뽕짝이나 듣지 뭐~ 패스해버리려 했던 음악영화.
하지만 안타깝게도
마지막 4분 간의 연주는 눈물 철철 감동의 향연이라는
헷갈리는 양다리성 멘트들이 여기저기 날아다니고
도대체 어쨌기에 그렇게 냉탕,온탕인가? 궁금증이 모락모락 일더니만
급기야 쓸데없이 바쁜 삶으로 인한 피로누적의 해결책으로
돈 주고 수면제를 복용하면서까지 잠 청하는 솔로들도 넘쳐나는 마당에
까짓 것, 졸리면 부담 없이 자주리라 다짐하며 이 영화를 보기로 결정하였으니
내게 남은 마지막 중대사안은
라스트 4분 전에 맞춰 어찌 깨어날 것이냐 밖에 없었다.
오호,
자고로 어제의 걱정은 어제, 내일의 걱정은 내일 할 것을…..
이 주제넘은 김치국물 들이마시기 식의 기우는
나의 피부 노화만 1시간 촉진 시켰을 뿐
하릴없는 근심, 숫자 틀린 로또 백장이 되고 말았다.
세상에..... 내 맘 같지 않은 사람이 이다지도 많으니…
역시 이놈의 세상은 넓디 넓고
각기 다른 모양 만큼이나 가치관 다른 이… 해변가 모래알이다.
“이렇게도 나를 몰라주나?”
내 생각 같지않은 세상에 대한 술 주정적 푸념에
“몰라 주는 것 당근 내츄럴이지.”
상냥히 화답하는 차디 찬 현실을 절실히 느끼게 되니
달라도 왜 이리 다른거야?
당 영화 다른 이의 우려와 달리
나는 정말 진짜 무지 재.미.있.었.다.
남탕인줄 알고 당연하게 열어 재친 문짝 뒤로 펼쳐지는 여탕의 낯선 미장센.
그에 따른 생물학적 반응
놀람…….흥분…… 환희….
포스터의 첫인상처럼’
목 디스크성‘고상’과 수면장애 클리닉‘잔잔’으로만 점철된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 엘비라 마디간성 클라식 영화인줄 안 “포 미니츠”
4분도 안되어 이내 표정 바뀌니
색상별 크기별 나신의 파라다이스 전시장을 본 사내의
복잡다단한 표정연기 바로 들어가시고
대학입학과 동시에 잃었던 고도의 집중력 되살아나시니
주위의 모든 소리를 쌩 까시는 혼연일체의 몰입 코마상태에 빠지고 만다.
이걸 단순 클래식컬 음악영화라 하면 이 사회 살만하니
아이들이 놀고 있는 부루마블 장난감 돈으로 카드비 막아대며
아랍 왕자의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되는 허황된 상상이 가능해진다.
무늬만 같다고 그것이 돈이 되나… 장난감 돈은 장난감 일 뿐..
그와 같이 이 영화,
음악으로 치장했을 뿐이지 실상은 소통에 관한 진한 심리 드라마다.
주부들 혼 쏙쏙 빼는 일일 불륜드라마같이 아침부터 질질 짜도록 강요하지 않지만
불 필요한 지방을 제거한 절제된 감정표현과 순 살코기 담백한 대사로
제대로 국물 우려내니 뒤 끝에 오는 묵직한 감동…… 지.오.오.디. Good!이다.
피아노를 가르치는 선생 크뤼거와 제자 제니의 이야기를 주축으로 한 이 영화는
이런 류 동종업계 영화가 따르는 스토리라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늘 그렇듯 서로 다른 상대의 이해 부족으로 시작한 갈등에서부터
여러 가지 가지가지 문제들이 일어나고 결국엔 그 모든 것을 공감하며 화해로 하나되는
나무 목도리 차던 춘향이 변 사또 뺨 때리는 익숙한 결말로 끝나게 되니
그 하고 있는 말은 똑같은데 그 결과물은 판이하다.
같은 대사, 같은 말을 해도 예쁜 우리 둘째 아들의 재능처럼
본 영화 감독, 옆집과 같은 루위비똥 상표 붙였을 뿐인데 바로 짝퉁 아닌 명품되신다.
아 이렇게 불공평한 것이 재능이란 말인가?
물만 먹어도 대나무처럼 쑥쑥 자라는 주윤발 삘나는 장대들을 바라보며
먹어도 먹어도 항상 제자리 뛰기인,
투자 대비 이익 구조 마이너스에 가까운 신체구조를 가진 내가
항시 느끼는 한탄과 부러움이 사정없이 밀려온다.
불굴의 의지를 가진 우리 형래 형님에게 이 능력이 더해졌다면
지금쯤 ‘디워’가 히틀러처럼 세계를 들썩일 것을……. 야속타~.
불과 두 번째 작품인 감독과 첫 데뷔작인 배우의 계산불가의 상황 속에서
명답안을 낸 “포 미니츠”는 지극히 매.력.적.
느슨할 수 밖에 없는 스토리를 감각적이며 역동적인 네러티브로 끌고 가시는 이 분들은
낚시광도 아닌 내게 소위 ‘손맛’이라고 하는 밀고 당김의 박진감과 전율을 주시고야 만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얼굴, 한결 같은 냉랭함의 선생 크뤼거와
불 같은 분노 늘상 얼굴에 띄우며 도자기 굽는 가마의 온도를 유지하는 제자 제니.
정말 어울리지 않는 이 둘은 첫 만남부터 불 보듯 뻔한 대립을 보이고
묵었던 쇼핑목록만큼이나 늘어선 갈등들이 터져 나오는데
적절한 방식으로 그 상황 적당히 버무리니 대사 없는 씬에서도 여백의 힘이 느껴진다.
세상 살다 보면 알다시피 그 ‘적절히’와 ‘적당히’가 얼마나 찾기 힘든 지점인가?
그 지점 정확히 찍어가며 풀어가는 두 캐릭터의 사연들이
보는 이의 마음도 묶고 크뤼거와 제니의 생채기도 봉합하니
전혀 다른 불협화음의 두 소리 조화롭게 합해져서 서로를 인정하기에 이른다.
절대 누구에게든 고개 숙여 인사하지 않겠다던 제니.
4분 간의 격정적 연주를 끝낸 후 머리 조아려 인사하고…
흑인음악 절대 안 된다며 펄쩍 뛰던 크뤼거 선생
클래식 상투째로 잡는 그 연주 보시고도
평소 마시지 않던 술 스트레이트로 석잔 꺾으신 후 박수 치며 웃어주시니
그들의 화해와 공감이 왜 이리도 감동스러운가?
훌륭한 피아니스트로 만들어 줄 순 있어도 더 나은 사람을 만들어 줄 순 없다고
망나니 같던 제니를 훈계하던 크뤼거 선생의 말이
60년 동안 교도소에 드나들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자신을 자책하는 책망임을 알게 된 순간,
누구라도 죽일 것 같던 생 날것의 사자스러운 제니가
연인과의 사랑을 지키기 위한 선택으로 교도소에 왔다는 것을 깨달은 바로 그 순간.
그 울림 앞에 순응하지 않을 이 누구인가?
사랑하는 사람을 버린 죄책감으로 사는 크뤼거 선생과
사랑하는 사람의 죄를 떠안고 냉정히 버림받은 제니
그들은 교도소에서 소통의 중간지대를 찾게 되니….
그 열쇠 바로… 음악에 대한 열정이었다.
완벽한 인생이 어디 있는가?
누구든 어딘가 나사 반쯤 풀린 곳 다 있고
지나쳐온 발걸음 어지럽기 매 한가지인데
누구를 욕하고 누구에게 돌을 던지랴~
상대의 모양을 있는 그대로 끌어안는 크뤼거와 제니의 아름다운 화해를 보고
내 인생 가운데에서도 그런 감격을 끼워놓고 싶은 은근한 바램이 생긴다.
화에 화를 내도 시원찮은 그 놈.
뺨 때리고 싶을 정도로 미운 바로 그 놈.
이왕 없이하지 못할 거
잠시 내 가치관 내 경험 내려놓고 한 발 다가서자.
운 좋게도 어른어른 내 모습과 비슷한 구석 보이기라도 하면
그때 가서 안아주자
혹 그러면 따뜻한 그의 체온 내게 흘러올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도 죽어도 이해되지 않으면
4분만이라도 이해하려 하자.
효리는 ten minutes 10분 안에 상대 맘도 뺐는데…
4분 안에…
그게 안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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