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 071007 용산 CGV 아이맥스관
허진호가 좋다. -허진호 감독은 나에게 특별한 사람이다. 그는 나를 모르겠지만 나는 그를 많이 좋아한다. 1998년 초입은 내가 대학 수능시험을 치른 다음 해였다. 나의 10대가 저물어가던 그 시기에 나는 아주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극장에 가서 <8월의 크리스마스>를 보았다. 영화가 끝난 후 퇴장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나는 일어서지도 못할 만큼 극장의 좌석에 파묻혀 엉엉 울고 있었다. 세계의 벽은 너무 높은 것만 같았다. 그리고 오늘 서른을 코앞에 둔 2007년의 나는 또 극장에 들어가 허진호 감독의 <행복>을 보았다. 여전히 생과 사의 중간지대에서 사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1998년에 느꼈던 그 높다랐던 벽, 그 벽은 조금도 허물어지지 않은 채 오히려 더 단단해져 누구도 넘을 수 없는 높이를 자랑하고 있었다.
임수정이 좋다. - 그녀는 허진호 감독을 만나지 않았더라도 항상 생과 사의 중간지대에 사는 사람이었다. <장화, 홍련>에서도 그랬고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에서도 그랬고 이번 영화 <행복>에서도 그랬다. 그녀는 항상 낯설어서 나는 그녀가 다른 영화에 나올 때마다 ‘어? 수미는 어디 갔어?’, ‘결국 영군이는 폐기된 거야?’ 라는 어눌한 의문을 가지곤 했다. 신기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영화마다 다른 사람이 되는 그녀는, 생과 사의 중간지대 주민인 그녀는 그래서 요정처럼 누구나 되었다가 또 아무도 아니었다가, 경계의 선 위에서 고운 춤을 추었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허진호 감독의 영화에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몸빼바지를 입고서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가쁜 숨을 피하려 느릿느릿 걷는 은희, 조금만 눈을 딴대로 돌리면 다음 순간 죽었다고 나올 것 같아 나는 도저히 은희에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안타까움이 그녀의 행복을 만들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행복은 죽어서야 완성되는 것처럼 보였다. 죽기 전에 제 앞에 엎드린 허름한 영수에게 뻗은 앙상한 손가락 끝이 환하게 빛나며 생의 마지막 행복을 끌어 모으고 있었다. 은희의 행복은 그렇게 완성되자마자 경계를 넘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이 행복한지 아닌지를 떠올리지 않아도 되었다. 그리고 나는 갑자기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은 내내 자신이 행복한지 아닌지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에 부담감이 들었다.
황정민이 좋다. - 이 남자를 어떠면 좋을까. 영수를 나쁜 놈이라고 욕하고 있으니 덩달아 배우까지 미워진다. 나쁜 놈. 황정민 나쁜 놈. 영수라는 놈은 어쨌거나 일관성 있는 놈이기는 했다. 제멋대로 살다가 몸 망쳐서 요양원에 처박혀 지내다 순진한 여자가 홀딱 빠지게 만들어 같이 살며 병수발 받다가 다 나으니 지루하니까 다시 예전에 흥청망청한 생활로 돌아가 다시 폐인이 되는 일관성 있는 놈. 그런데 나는 문득 영수에게 홀라당 반해 버린 은희는 얼마나 행복했을까...를 미지근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만큼, <행복>에서의 황정민은 정말 ‘멋진 남자’였다. 얼마 전 본 <본 얼티메이텀>보다 더 영화 속의 영수는 남자다움을 머리가 어질하도록 짙게 풍기고 있었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딱 여자의 순애보를 물큰물큰 피워 올리게 만드는 데가 있었다. “원래 남녀가 어두운 극장에 가면 손잡고 그러지 않아요?” 시침 뚝 떼고 말하는 은희에게 “이런 으슥한 산길을 걷는 건 뽀뽀하려고 그러는 거예요”라고 한술 더 뜨는 영수가 나누던 입맞춤 장면. 숨이 차 바위에 걸터앉은 은희에게 손을 뻗었던 영수. 은희의 손을 붙잡고 허리를 숙여 가만히 여인의 입술에 입맞추던 영수.......나는 아무래도 영화 마지막에 다시 폐인이 되어 거지같은 꼴을 하고 눈이 소복이 쌓인 희망의 집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던 나쁜 놈 영수보다, 으슥한 산길에서 몸을 구부려 은희에게 입을 맞추던 멋있는 영수를 더 기억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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