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지점프를 하다 이후로 딱히 맘에 드는 영화가 없었는데, 그래서 풍요 속 빈곤이라고 떠들었었는데, 살인의 추억, 올드보이, 태극기를 보고도 그냥 그랬었는데..
아... 이 영화 재미있다. 야한 영화 쯤으로 치부하는 인간들이 있을 수도 있다. 뭐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나오는 베드신은 에로티시즘이 아니다. 돈을 벌어야 했기에.. 상업적인 측면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고.. 굳이 벗는 장면없었어도 스토리 전개가 가능했을 수도 있다. 그래도 이 영화가 얘기하고자 하는 건 절대로 에로티시즘이 아니다. 야하기를 기대하고 본 사람들은 무지 실망했겠지... 그럴 수밖에 없지...
유림은 참... 사랑의 ''사''짜도 모르는 인간이다. 근데 남자들은 그렇다.(물론 안 그런 남자도 많고 그렇다고 해도 이 정도는 별로 없다 ㅎㅎ) 사랑이라는 건 그에게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그냥 그는 적당히 바람피우며, 적당히 여자친구 만나며 적당히 직장생활하며 살고 있다. 사랑? 사랑이란 건 원래 없는 거다. 유림은 세상을, 사랑을 지 멋대로 규정지어 버린다. 차라리 솔직해라. 괜히 멋있는 척, 로맨틴한 척 한 놈들이 더 나쁘다. 결국 다 그런 거다.
홍은 아프다. 죄라고는 자기의 모든 것을 바쳐 사랑한 죄밖에 없는데 그 대가는 너무 컸다. 모든 것을 잃은 걸로도 모자라는지 세상은 그녀를 손가락질한다. 모든 걸 잃고도 홍은 지독한 불면증에 시달린다. 세상이 무서워서 그녀는 잠을 잘 수가 없다. 그녀는 아프다. 아직도 사랑을 꿈꾸지만 사랑은 없는 거라고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 잡는다. 웨이브를 넣은 자신의 머리처럼 그녀는 험한 세상에서 그렇게 꼬여버렸다.
"사랑? 최선생님 어리구나. 아직 애네. 그런 감정은 딱 3개월 간대요. 미국의 어느 박사가 연구했는데 3개월 지나면 그런 호르몬이 만들어지지도 않는데요. 누가 결혼하재요? 첫눈. 아.. 그러면 되겠다. 첫눈 올 때까지만 연애해요. 그러면 되잖아요."
유림은 노골적으로 사랑을 부정한다. 사랑에 대해 떠드느니 솔직하게 자자고 말하는 자기가 쿨한 거다. 남자는 이렇다. 사랑같은 거.. 뭐 별 건가? 개가 똥 참는 거 본 사람? 이라면서 여자도 자기같을 꺼라고 생각해버린다. 자기처럼 욕망에 시달리면서 괜히 내숭떠는 거라고 맘대로 결정지어 버림으로 자기의 행동에 합리성을 부여한다.
"너 누나 처음 봤을 때부터 자고 싶었지?"
홍은 다 알고 있다. 사랑을 믿었다가 크게 아파서인지 유림이 자기한테 왜 이러는지 이제는 알 법하다. 그치만 애써 ''도대체 저한테 왜 이러세요?''라며 내숭이다. 아직도 사랑을 믿고 있다. 여자는 이렇다. 사랑하기에 조심스럽다. 사랑이기에 더 소중히 하고 싶다. 이렇게 조심하는데도 이렇게 빠져든다. 그래서 사랑이다.
여기에서 끝났다면 이 영화 별 거 아니었다. 이렇게 끝났다면 가슴 속 찝찝함만을 가득 채운채 극장을 나섰을 것이다. 사랑이 뭔지도 모르는 것들이 떠들어대는 걸 들어줄 생각에 골치가 아파왔을 것이다.
"어~ 그러니까 나는 싫은데 나랑 있으면 잠이 잘 오니까 날 이용해 먹은거네?"
"어~ 그런 거야. 넌 그런 존재야."
유림이 이상하다. 홍을 알면 알 수록.. 그녀의 상처에 그가 너무 아프다. 홍과 함께인 시간이 무엇보다 소중하고 자꾸 여기저기에 자랑하고 싶다. 분명히 잘못된 관계일텐데 신나게 떠들고 싶다. 남자는 이렇다. 앞뒤 안 재고 저지르고 본다. 작은 행동 하나, 하나가 본의 아니게 사랑하는 이를 다치게 할 수도 있는데.... 아무것도 모른다. 그냥 신났다. 뒷일 생각하기도 싫고 그냥 지금 너무 좋다. 여자친구를 놓고 바람을 피우는 건데도 오히려 당당하다.
홍은 남자친구를 만나도 유림이 얘기를 한다. 이상한 사람이라고 자기랑 안 맞는 것 같다고 본 마음과는 거꾸로 된 얘기를 늘어놓는다. 여자는 이렇다. 배경? 그런 것 때문에 이러는 거 아니다. 자기때문에 다른 사람이 아파야 하는 건 싫다. 한 번 아파본 사람은 자신에게 잘 하는 사람을 아프게 할 수 없다. 아니 딱 한 가지 경우에만 가능하다. 사랑에 빠졌을 경우, 여자는 기꺼이 모든 것을 포기한다.
예상치 못한 사고가 터진다. 학교 홈페이지에 둘의 관계와 함께 홍의 과거까지 악랄하게 들춰진다.
"똑바로 애기 안 하면 니네 다 죽어. 퇴학이야 퇴학!"
유림은 분노한다. 누가 그랬는지 색출하기 위해 고문하고 심문하며 분노를 표출한다. 사건의 수습을 위해 동분서주한다. 사랑을 해 본 적 없는 바보는 이렇다. 자기가 그렇게 분노하는 게 사랑때문임을 알았다면 그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는 것이 먼저일텐데.. 그렇게 화를 내고 있는 동안에도 사랑하는 사람은 아파하고 있는데.. 유림은 문제 해결에만 급급한다. 그 모든 문제보다 중요한 사람이 아픈데도 바보같이 아무것도 모른다.
"이 선생님은 뭐라고 하세요? 이 선생님이 그랬어요?"
홍은 분노한다. 자기에게 주어진 악의적인 세상때문이 아니라 자기가 믿었던 사랑에 분노한다. 사랑 하나면 되는데 그걸 몰라주는 사랑에 분노한다. 사랑을 위해서라면 감수할 수 있는데 사랑을 잃으면서까지 모든 것을 다 잃을 수는 없다. 사랑이라서 분노한다. 진짜인데 그 사랑이 아무것도 아닌 대접을 받아서 홍은 분노한다. 이런 엄청난 사건 아래에서도 홍의 관심은 오직 유림이다. 이 선생님이 그랬어요? 홍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학교도 짤리고 작은 학원 강사로 그날 그날 살아가는 유림 앞에 홀연히 홍이 나타난다. 얼만큼의 시간이 흘렀는지 홍은 어느덧 긴 생머리 차림이다.
감독은 뻔뻔하게 홍의 입을 빌려 유림에게 말한다.
"어? 웨이브 넣었네"
술에 취해 홍에게 소리를 지르는 유림.
"너 진짜 나쁜 년이야. 나 너 이후로 여자 믿을 수도 없고 무서워서 여자 사귀지도 못해."
어디선가 들었던 것 같은 이 대사. 언젠가 유림에게 울며 소리쳤던 홍의 그 모습이다. 눈물을 흘리며 소리를 질러대는 유림은 파마머리.
"그래서 내가 책임질께. 나 이제 잘 자. 그래서 고맙다구."
둘이 내딛는 첫발에 첫눈이 내린다. 모든 것이 엉망인 것 같은 상황에 내리는 첫눈. 언젠가 끝을 의미했던 첫눈은 사실은 이제서야 모든 것이 바로 잡혔다는 뜻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