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장르-오타쿠가 쓴 팬픽션의 영화
디지털 액터가 성격배우 같고, 성격배우가 디지털 액터 같은, 디지털 판타지의 중간계
인간과 드래곤이 자유롭게 살아가던 알레게이지아는 갈바토릭스(존 말코비치)의 등장과 함께 암흑천지가 된다. 난세에는 영웅이 등장하는 것이 중간계의 보이지 않는 헌법. <에라곤>의 영웅은 삼촌 가족과 살던 십대 소년 에라곤(에드 스펠리어스)이다. 그는 야밤에 사냥을 나갔다가 엘프족 아리아(시에나 길로리)가 순간이동으로 날려보낸 드래곤의 알을 발견하게 되고, 깨어난 드래곤 사피라(레이첼 바이스)는 에라곤을 자신의 라이더(Rider)로 지목한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영웅이 되어버린 에라곤은 갈바토릭스의 측근인 마법사 더자(로버트 칼라일)의 추격을 받는 한편, 떠돌이 전사 브롬(제레미 아이언스)의 도움을 받으며 반란군의 도시에 도달해야만 한다.
<에라곤>은 (당시 나이로) 15살 미국 소년 크리스토퍼 파울리니의 동명 원작을 각색한 영화다. ‘북미에서만 2500만권이 팔려나간 베스트셀러’라는 광고 문구에 짓눌릴 필요는 없다. <스타워즈>와 <반지의 제왕>을 케이블TV로 시청하며 자랐을 법한 소년이 창조한 세계는 판타지 장르의 오랜 관습들이 끝없이 반복되는 중간계다. 이를테면 변방의 소년 에라곤이 영웅으로 성장하는 과정은 루크 스카이워커의 출세담과 쏙 빼닮았고, 알레게이지아는 톨킨의 중간계를 간결하게 축약한 듯한 모양새다. 사물의 이름을 엘프어로 익혀야만 마법을 행할 수 있다는 설정은 어슐러 르 귄의 <어스시의 마법사>에서 빌려왔음에 틀림없다. <에라곤>을 젊은 장르-오타쿠가 쓴 팬픽션의 영화라고 일컬어도 틀린 표현은 아닐 터이다.
ILM 수재였던 감독 스테펜 팽메이어는 관습적인 이야기의 결을 다듬는 대신 디지털 특수효과에 온 힘을 쏟아부은 인상이 역력하다. 특히 ILM과 웨타가 공동으로 공들인 드래곤 사피라는 디지털 특수효과의 역사책에 길이 남을 괴물이다. 말하는 드래곤이라면 이미 <드래곤 하트>(1996)의 드라코라는 전례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숀 코너리의 목소리를 빌린 드라코가 데니스 퀘이드와 환담을 나누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반면 사피라는 에라곤을 등에 태우고 마음껏 공중제비를 돌아도 어색함이 없다. 문제는 디지털 액터의 진화를 웅변하는 사피라의 날갯짓 아래서 제레미 아이언스와 로버트 칼라일 같은 배우들조차 체스판 위의 말처럼 생명력이 없다는 사실이다. 디지털 액터가 성격파 배우가 되고 성격파 배우가 디지털 액터로 보이는 아이러니라고나 할까. (글 : 김도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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