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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 건너기 - 아담스 애플(Adams Aebler, 2005) 아담스 애플
hepar 2007-04-27 오전 12:38:34 1489   [0]

덴마크, 독일 합작의 코미디 영화. 잔혹 황당 엽기 코미디라 이름 붙여도 좋을만큼 너저분한 영화다. 하지만 그렇게 제 멋대로 내벌여 놓기만 하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모든 걸 단박에 그러모아 가슴팍을 퍽 하고 쑤신다.

비극과 희극, 이성과 비이성의 맹렬한 자리바꿈. 채 읽히지 않는 잡다한 종교적, 철학적 암시 속에서도 영화가 애초에 말하고자 했던 작은 목소리는 점점 커져 단순하나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 라스트 신. 우리는 어쩌면 젊은 날의 카뮈가 도달하지 못한 그 지점을 엿보게 될는지도 모른다.

나는 이 영화를 보고 서영은의 '사막을 건너는 법'을 떠올렸다. 영화의 주인공인 목사 '이반'의 모습 위로 이 소설에 등장하는 뽑기 파는 노인이 오버랩되었기 때문이다. 삶의 행불행을 재는 바로미터가 있다면 그들은 나란히 한 눈금에 섰을 게다.

소설 '사막을 건너는 법'의 뽑기 파는 노인은 공터에 파라솔을 펴 놓고 '뽑기' 장사를 해 손녀딸과 개를 먹여 키운다. 하지만 장사는 뒷전이고 틈만 나면 무언가를 찾아 동네 곳곳을 뒤지고 다닌다. 알고보니 노인이 찾고 있었던 것은 아들의 훈장이란다. 월남에서 전사한 아들이 남긴 훈장. 소중하게 간직해온 그것을 그만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소설 속 주인공은 월남전에 참전했다 받은 자신의 훈장을 마치 잃어버린 그 훈장인 것처럼 속여 노인에게 준다. 고마워할 줄로만 알았는데... 노인은 훈장을 내민 그에게 불같이 화를 낸다. '바보같으니라구!'

알고보니 그 훈장은 잃어버린 것이 아니었다. 그 노인이 직접 버린 것이었단다. 사실은 손녀딸도 1년 전에 교통사고로 죽었단다. 기르던 개도 제 것이 아니라 주워온 것이란다. 왜 아끼던 훈장을 웅덩이에 내던져 버렸을까? 왜 있지도 않은 손녀딸을 있다고 거짓말을 했을까? 왜?

영화 속 '이반'은 믿음이 깊고 교리에 충실한 삶을 사는 전형적인 목사...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요 '이반'이라는 사람, 보면 볼수록 수상하다. 쿠키 한 조각을 가지고 치사하게 굴질 않나, 상담하러 온 여인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나, 교회에 함께 기거하는 사람들의 범죄행위를 모른척 하고 자신의 아들이 장애인이란 사실에 대해 그 아이는 정상이라고 끝까지 거짓말을 한다.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인, 네오 나치스트 '아담'은 이런 '이반'의 모습에 격노한다. 목사라는 직업,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종교적 교의 뒤에 숨겨진 위선을 보았기 때문이다. 분노한 그는 거짓말을 하는 '이반'의 입에 주먹을 날리고 구둣발로 마구마구 짓밟는다. '이반'의 얼굴은 일그러질대로 일그러지지만 결코 분노하거나 증오하지 않는다. '모든 시련은 하나님의 시험'이라는 종교적 논리. 하지만 '아담'은 이에 더욱 분노한다.

'이반'은 어릴 적 누이와 함께 아버지에게 성적 학대를 받았다. 누이는 자살했고 뇌성마비인 아이를 낳은 아내 또한 자살했다. 그에게 남은 것은 휠체어에 꼼짝않고 앉아 있는 장애자인 아들, 그리고 그의 머리 속에 들어있는 커다란 종양 뿐이었다.

기구하다는 표현이 모자랄 정도로 고통과 절망으로 가득찬 삶을 살아온 '이반'. 신에 대한 믿음만을 좇아온 그에게 하나님은 손 한 번 내밀어 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그에게서 '희망'을 찾아볼 수 있을까. 그에게서 내일은 더 나을 거라고 이야기해 줄 수 있을까.

하지만 '이반'은 분노하거나 절망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거짓말을 한다. 뽑기 파는 노인이 그랬던 것처럼. 뇌성마비인 아이를 정상이라 여기고 이를 공공연히 떠드는가 하면 자신의 불행한 과거를 행복한 것으로 거짓 기억한다.

누구나 어느 정도의 고통은 안고 사는 법이다. 하지만 극한의 고통에 봉착하거나 삶에서 더이상 의미를 건져내지 못할 때 인간은 절망한다. 이때 어떤 이는 죽음을 택할 것이고, 어떤 이는 무용한 희망에 실날같은 기대를 걸 것이다.

하지만 또 다른 이는 죽음도 아니고 무용한 희망도 아닌, 그저 그대로를 감내하는 길을 택할 것이다. 카뮈는 그것을 '반항'이라고 말했다. 희망하지도 않고 도피하지도 않고 그저 자신의 현실을 직시하고 확인하는 것. 체념은 더더욱 아닌 것이 '반항'이라 했다. 그리고 그것을 '사막에서 버티기'라고 칭하며 삶에 대한 '반항'이야말로 인간이 스스로의 한계를 극복하는 유일한 길이라 했다.

하지만 노인과 이반은 이와는 또 다른 길을 택했다. 그들은 그저 고통을 감내하는 데 머물지 않았다. 어쩌면 그들은 새로운 현실을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사막에서 버티'지 않고 그 '사막을 건너기 위해서'. 설사 그것이 사실이 아닐지라도, 그저 거짓일 뿐일지라도 말이다.

희망할 수 없는 내일이 주는 절망은 죽음을 앞둔 시한부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신이 이제 너의 행복은 끝났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인간이라는 것. 고통만을 자근자근 씹다가 끝내 단말마를 토해내는 것이 인간의 생이라면 삶을 온전히 살아내는 방법은 어쩌면, 그 작은 거짓으로 고통을 다스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것도 현실도피가 아니냐고 말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반'의 머리 속에서 자라나는 종양은 그것이 단순히 현실도피가 아님을 보여준다. 제가 버린 훈장을 찾으려는 노인의 처절한 발버둥이 그것이 단순히 현실을 잊기 위한 방편이 아님을 알려준다. 그것은 끝까지 인간성만큼은 지키고자 하는 가열한 노력이 아닐까. 쾌락에 물들지 않고 무용한 희망에 기대지 않고 분노하지 않고 증오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고 죽지 않는 것. 살아가기 위한 너무도 인간적인 선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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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스 애플(2005, Adam's App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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