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우한 아이들과 다정한 교사가 엮어가는 코러스
공연을 앞둔 세계적 지휘자 피에르 모항주(자크 페렝)에게 어머니의 부음이 전해진다. 침착하게 공연을 마친 뒤 귀국해 장례를 치른 그를 옛 친구가 방문한다. 친구가 내민 기숙학교 시절의 사진과 한권의 낡은 일기는 거장에게 음악의 영감을 처음 가르쳐준 스승의 기억을 불러낸다. <시네마천국>에서 영화감독 살바토레로 분했던 자크 페렝을 기억하는 관객이라면, 이번에는 음악가가 되어 똑같은 회상에 잠기는 그의 모습에 미소 지을 것이다.
프랑스 국민 20%를 관객으로 동원한 흥행 여세를 몰아 올해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부문 프랑스 후보작으로 출품된 <코러스>는, 몇 소절만 귀 기울이면 아름다운 멜로디를 미리 흥얼거릴 수 있는 노래 같다. 진실한 가르침으로 아이들의 인생을 영원히 바꾸어놓는 참다운 교사가 이 익숙한 노래의 주인공. 때는 1949년. 음악가로서 경력의 막장에 다다른 클레망 마티유(제라르 쥐노)는 전후 폐허에서 버림받고 비뚤어진 소년들을 모아놓은 초라한 기숙학교에 부임한다. 왜 사직했냐는 마티유의 질문에 전임자는 짧게 답한다. “열 바늘 꿰맸소.” 폭력과 독방감금이 예사인 학교의 소음 속에서 선생은 용케도 소년들의 음색을 듣는다. 그래서 그들을 위한 합창곡을 쓰고 코러스를 조직한다. 내성적인 소년 피에르에게 깃든 천상의 재능은 마티유의 열정에 불을 붙인다. 그는 오직 합창을 가르칠 뿐이지만, 음악은 아이들에게 그 밖의 모든 교훈을 가르친다. 합창단은 앵무새처럼 “정숙!”(silence)을 외치는 관료적 교장에게 맞서 은밀한 연습을 멈추지 않는다.
불우한 아이들과 다정한 교사가 엮어가는 <코러스>의 내러티브에는 <쿠오레>(사랑의 학교)식의 재미가 있다. 주제곡 <In Memoriam>을 비롯한 소년들의 합창은 <사운드 오브 뮤직> 폰 트랩가의 공연장면처럼 관객을 심정적 후원자로 끌어들여 자랑어린 환희를 맛보게 한다. 그러나 즐길 만한 장면들을 꿰는 <코러스>의 상상력은 지나치게 뻔하고 낙천적이다. 이를테면 “이 애들에게 뭔가 해줄 수 없을까?” 같은 대사는 없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 교장을 제외한 학교 전체가 한편이 될 필요까진 없었을 것이다. 아이들의 합창 실력은 좀 더디게 향상되어도 좋았을 것이다. 피에르는 자라서 평범한 음악교사가 되었더라도 무방했을 것이다.
전통적인 할리우드 ‘참교육 드라마’에 비해 <코러스>가 갖는 상대적 미덕은 거꾸로 영화가 가벼워지는 대목에서 빛난다. 이 미덕의 태반은 1945년 프랑스영화 <나이팅게일 새장>에서 빌려왔다는 교사의 캐릭터에서 나온다. 보통 정도의 재능과 자존심을 가진 클레망 마티유는 고결한 영웅이 아니다. 아이들에게 합창을 가르친 애초의 동기도 <홀랜드 오퍼스>의 리처드 드레이퓨스보다 <스쿨 오브 락>의 잭 블랙에 가깝다. 학생의 어머니에게 딱한 연심을 품기도 한다. 그는 투사가 아니라 그저 잘 통합된 인간이다. 커피잔의 설탕을 젓는 듯한 심상한 태도로 아이들을 돕는 그는 극히 자연스럽게 선량하다. 아이들의 마지막 합창을 음미하던 희열의 날, 마티유 선생은 일기에 쓴다. “나는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외침을 누가 듣겠나?” 그리고 50년 뒤, 과연 피에르는 선생님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코러스>에서 가장 인상적인 화음을 내는 것은 이 두 장면이다. (글 : 김혜리-씨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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