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둔감해서 인지, 내가 사는 이 한국이라는 나라가 작은 나라이어서 인지, 아니면 내가 있는 위치가, (샤회적, 정치적인 의미로) 낮아서 인지, 정말 어떠한지는 몰라도, 학자나 정치가들이 말하는, 작고 큰 디스토피아(어두운 미래)적 예측은, 마치, 떠벌이 점쟁이의 소리처럼 들린다. 하지만 나의 환청도 틀리지는 않는 이유는, 단지 배경 사상이나 말하는 사람의 지위만 달라졌을 뿐, 미래를 우려하는 목소리는, 원시시대 샤면이나, 조선시대 정감록이나, 지금의 인류학자나 모두 내어 왔던 것이므로.
사람이 미래에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나 문제는, 다시말하면, 인간은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하는 본능이 뿌리깊게 존재한다,는 명제의 다른 말이다. 무엇을 위해 사는가, 라는 문제보다는, 살아남기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가.가, 어떤면에서는 더욱 본질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그.런.데. 적어도, '생존을 위한 행동'이라는 배경을 두르고 있는, 근대와 현대, 그리고 적어도 구미의 역사는, 참으로 모순적이다. '생존을 위한 행동'은, 역으로 그 행동에 무한한 범위와 가능성을 열게하는데, 그 가운데는, '배타적으로 생겨버린 타인의 관념에 대한 부정'도 들어있다. 무슨말이냐면, 살아남기 위해서는 사람을 죽여야 한다는 것. 이다.
이 말은 거대한 모순이다. 아니, 과장되게 말하는 것이라는 오류가 있겠지만, 정말 이러한 원리나 방법으로만 인간이 살아간다면, 결국은, 결국은, 인간 한 사람만 남게된다는(나머지는 죽는 다는) 이야기이다. 웃기는 이야기, 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현대적인 의미의 '국가'라는 관념이 생긴 이후, 벌어진 1, 2차 세계대전 가운데서, 지구 상의 인간은, 디스토피아라는 말을 배워 버렸다. 생각하는 똑똑한 생물에서 어느 덧, 자기를 멸망시키는 유일한 생명체가 되어버렸으며, 그.래.서 인간은 자기가 세운 에덴동산의 어느 자리에서, 순식간에, 수술대 위에 묶여 '개조되어야 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어쨌다는 것인지. 절대 지구와 자신들을 멸망시키지 않을 개조 인간인 '바이오로이드'이든, 인간의 씨를 말려버리려 많은 다리를 부지런히 움직이는 거대 기계의 전원스위치를 눌러버린 '사랑과 의지의 인간'이든, 인간의 본능과 미래의 본질에 있어서는, 어느 쪽이든 실은 절대 상관이 없다.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개조된 인간에게 모든 것을 맡겨버린채, '또 다시' 자신을 죽이려한 현명한 인간들, 이다. 적어도 이들보다는, '이대로 가다가 인류는 20년 안에 멸망할 것입니다'라고 겁없이 지껄여 대는 환경학자가 더 귀여운 셈이다. 이 둘은 비슷한 듯 하지만, 아주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데, 후자는 '걱정'이지만, 전자는 '포기'라는 것이다. 걱정은, '그러지 않기를 적어도 바라기는 하지만', 포기는 그러한 것 조차 없이, 자신들을 멸망시키는 인간의 타나토스적 본성을 추종하는 것(정말 크나큰 위험이 아닌가)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희망'. 어느 작가는,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한 그루의 사과 나무를 심겠다고 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할지 않알지(모레 멸망할지), 사과나무를 심던, 배나무를 심던,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멸망하는 내일을 위해 나무를 심는 오늘,의 우둔성은, 곧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그동안 잘은 보이지 않았지만, 인간의 깊숙한 어딘가에 존재하며, 마치 천사와 악마처럼 '죽음'의 본능과 싸워온 전사의 힘이다.
그래서 우리는 인정해야하는 셈이다. 내일 지구를 멸망시키는 존재는, 비록 우리 인간이지만, 그래도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우겨대는 존재도 인간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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