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받는 대상과 사랑을 받지 못하는 대상간의 차이는 분명하다. 우리는 강아지에게는 이름을 지어주지만 돼지에게는 이름을 지어주지 않는다. 그것은 돼지가 애정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돼지를 가축의 범주로 본다. 그래서 돼지는 인간에게 끌어안겨지지도 않으며 털을 빗는다거나 목욕을 시킬 필요도 없다. 단지 시간에 맞춰 밥만 주고 비대해진 몸을 바라보며 언젠가 식탁에 오를 그 날을 기약하면 될 뿐이다.
동물들이 등장하는 영화들은 대부분 동화적인 순수함을 모티브로 하게 마련이다. 가족적인 평화로움과 유아적인 순수함. 그것은 어쩌면 지독한 클리셰와 같은 법칙인데 그 반복적 행위가 어필되는 것은 그것이 정당한 불변적 가치를 머금고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 혹은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하는 것은 반복적으로 이야기되어도 당연한 것이다. 이 영화의 정서가 그렇다. 그것은 우리가 영화의 선한 눈빛에 감화되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비가 내리던 어느 늦은 밤 펀(다코타 패닝 역)은 잠에서 깨어나 헛간에 불이 켜진 걸 알고 뛰쳐나간다. 어미 돼지가 새끼들을 출산한 것. 그러나 그 중 다른 새끼들 틈바구니에서 젖을 빨지 못하고 헤매이는 한마리를 발견한 펀의 아버지가 그 새끼를 죽이려는 것을 펀은 막고 자신이 그 한마리를 대신 키우겠다고 한다. 펀은 그 돼지새끼에게 윌버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사랑과 정성으로 돼지를 키운다.
자신의 작품인 '스튜어트 리틀'이 영화화 되기도 했던 엘윈 브룩스 화이트의 동명 원작 동화를 영화로 고스란히 옮긴 이 작품은 유아적인 순수함 그 자체의 본성을 토대로 진행되는 이야기다. 사실 이렇게 너무나도 착해보이는 이야기는 식상할 법도 하고 성인 관객의 입맛에 맞는 극적재미가 미흡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티없는 선함은 분명 호감을 줄 법하다. 작위적인 이야기의 불순함이 아닌 본질적인 순수함이라면 말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본질을 만끽하게 하는 것은 아이와 동물이라는 순수한 본성의 그릇덕분이다.
돼지를 죽여야한다고 믿는 어른들과 달리 펀은 돼지를 기르겠다고 결심한다. 그것은 펀의 아버지는 돼지라는 동물이 가축이라는 목적대상으로 이해하기 떄문이다. 하지만 어린 펀은 돼지를 그런 목적에서 떠나 생명으로 이해한다.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고 갓 태어난 생명을 죽일 수 없다는 펀의 생각은 아이의 차별없는 순수한 가치관에서 비롯되는 발상이다.
이야기 자체의 순수함에 극적인 재미를 불어넣는 것은 헛간 속의 동물들간의 교감이다. 말과 젖소, 양, 거위, 그리고 쥐까지. 일단 극 속의 동물들은 서로간에 대화를 나누고 서로간의 생각을 논한다. 봄에 태어난 스프링 피그(spring pig)들의 운명이 크리스마스가 오기 전에 훈제실로 직행하는 것을 아는 동물들은 윌버를 측은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윌버는 죽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런 윌버의 생각을 현실화하는 것은 거미 샬롯(줄리아 로버츠 목소리 역)이다. 샬롯은 다른 동물들로부터 혐오감을 얻지만 윌버에게는 호감을 얻고 친구가 된다. 그리고 윌버를 통해 다른 동물들 역시 마음을 연다. 그리고 그런 윌버에게 보은하기 위해 샬롯은 혼신의 힘을 다해 자신의 거미줄로 인간들에게 윌버의 운명을 돌리는 기적을 일궈낸다.
우리가 인간보다 어리석다고 믿는 동물들이 극을 통해 자신들만의 생각을 지니고 선한 본성으로 무언가를 시도하는 것을 목격함으로써 영화는 인간이라는 종적 우월성을 자극한다. 인간보다도 인간적인 동물들의 행위는 그것이 픽션이라 할지라도 현상안의 덕목만큼은 진실된 전달력을 지닌 것이다. 사실 돼지 한마리 살리는 것은 별 대수롭지 않은 일이며 무시할 법한 비현실적 사연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대단치 않은 일이 주는 감동의 투명성은 생각보다 크다. 우리가 간과하는 것들. 단순히 문명의 이기를 살아가는 인간중심적 오만함에 젖어있는 우리에게 이 영화는 순백의 질타를 준다. 그 무난한 플롯이 안겨주는 행복의 감정은 무한한 셈이다.
사실 정적인 이야기가 줄 수 있는 지루함을 보충하는 것은 동물들의 활극이다. 배우들의 목소리를 통해 생명력을 얻은 동물들의 연기는 시각적인 재미와 함께 영화의 감성을 더욱 맑게 정화한다. 헛간 안의 동물들이 각각 자신들의 이름으로 불러짐으로써 그 부질없는 무리들은 각각의 의미를 얻는다. 무의미하다 여기는 것들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 그것은 사랑과 관심이다. 사랑받지 못한 것들에게 사랑을 부여하고 관심을 주는 행위. 물론 우리가 소비적 목적으로 기르는 동물들과 애완의 목적으로 기르는 동물간의 차이는 분명하지만 그런 노골적인 목적 이전의 본질적인 사랑 바로 목적없는 사랑 그 자체를 생각하게 만든다. 생명이라는 본질에 대한 순수한 고찰을 말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作 '꽃' 中
물론 이 영화를 본다 해서 채식주의자가 되거나 혹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결심하진 않을 것이다. 또한 종적인 우월관계가 보여주는 먹이 사슬이 죄악시될 이유도 없다. 다만 우리가 미천하게 여기는 타종의 희생을 통해 생존의 고리를 이어가고 있음을 한번쯤은 생각해보는 것도 인간적인 자존심에 합당한 그릇이 되지 않을까. 이 영화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 지점일 것이다. 우리가 앗아가야 하는 것들에 대한 몰염치한 태도를 거두고 우리가 누리는 혜택들에 대한 적당한 감사를 표할 줄 아는 마음. 물론 박애라는 생색을 표할 것까지는 없다.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거미가 거미줄을 칠 줄 안다는 것이 기적이라는 것을 공감할 수 있다면 그 거미줄에 걸린 겸손함(humble)을 배울 자격이 있다.
-written by kharisma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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