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네 학당’을 보자. 중앙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서 있다. 플라톤의 손가락은 하늘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손가락은 땅을 가리키고 있다. 그들이 지시하는 것은 이데아와 현실이다. 조금 시선을 옮겨 그림의 오른쪽 아래를 보자. 한 남자가 컴퍼스를 들고 뭔가를 설명하고 있다. 그가 바로 피타고라스다. 피타고라스는 수(數)를 만물의 근원이라 보았다. 만물은 수의 관계에 따라 세계를 구성하고 그 질서는 바로 우주의 질서다. 그가 말한 ‘수’의 질서는 곧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와 통한다. 하지만 세상은 불완전하다. ‘피타고라스의 정리(a²=b²+c²)’를 발견해낸 그지만 그가 그리는 삼각형은 그 질서를 완벽하게 구현해내지 못한다. 아니, 인간은 한 변의 직선조차도 제대로 그려내지 못한다. 완벽한 직선이라는 것은 관념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수학은 신비롭다
영화 ‘박사가 사랑한 수식’은 수비주의의 경향을 따르고 있다. 수비주의란 세상의 질서를 ‘수’에서 찾는 일종의 신비주의 학문이다. 세상의 근원을 ‘수’로 본 피타고라스와 그의 제자들처럼 말이다. 박사는 이들처럼 숫자를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 교통사고로 80분의 기억 밖에 유지하지 못하지만 그는 예전에 수학자였다. 실용적인 목적 외에 우리에게 아무 의미도 되지 않는 신발 치수나 전화번호도 그에게는 세상을 읽는 하나의 코드가 된다. 사람과의 관계도, 사물을 인식하는 방법도 모두 숫자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에게 있어 수라는 것은 세상과 소통하는 그 만의 언어이고 수의 질서는 자신과 세상을 연결하는 의미이다.
우선, 박사가 보여주는 수의 신비를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가정부의 전화번호는 576- 1455. 이 숫자는 1에서 1억 사이에 존재하는 소수의 개수다. 또 가정부의 생일이 2월 20일이라고 하자 상으로 받은 그의 시계를 보여주며 시계 뒤에 새겨진 284라는 숫자와 220의 특별한 관계에 대해 이야기 해준다. 220의 약수를 모두 더하면 284가 되고, 반대로 284의 약수를 모두 더하면 220이 된다. 220과 284는 친화수(親和數, amicable number, 우애수는 일본식 표현)다. 불과 수백 쌍밖에 발견되지 않은 특별한 숫자의 관계인 것이다. 또한 유클리드가 명명한 완전수(完全數, complete number)라는 개념도 찾아볼 수 있다. 완전수란 6, 28과 같이 자신을 제외한 약수의 합이 자신과 같게 되는 수를 말한다(6=1+2+3). 이 완전수는 자연수 중 불과 30여 개에 불과하다고 한다.
우리는 ‘수’라는 것을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세상은 온통 숫자놀음이지만 정작 그 수라는 것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을 하지 않는다. 주식이 몇 % 포인트 오르고 집값이 평당 몇 백인지에 대해서는 입이 마르도록 떠들어 댄다. 결국 우리가 사용하는 숫자란 그것이 무엇을 표현할 때, 특히 가치를 표현하는 것일 때에만 비로소 의미 있는 것이 된다. 영화는 수의 신비로운 조화를 통해 그리고 거기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해 나가는 박사의 모습을 통해 세상의 질서와 그 조화로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단지 숫자 놀이일 뿐이라고 말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여기에는 진리를 탐구하고 갈망했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피타고라스가 가졌던 고대인의 감성이 스며들어 있다. 그것은 이제는 거의 잊혀져버린 순수에 대한 무한한 동경이며 보다 완벽하고 조화로운 세상을 꿈꾸는 인간의 소중한 꿈이다.
기억하지 못하는 자, 기억하는 자의 아픔
박사는 80분의 기억밖에 유지하지 못하는 기억손실증 환자다. 영화 ‘메멘토’나 ‘첫 키스만 50번째’에서 보았듯 기억하지 못하는 자의 삶은 고통스럽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기억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기억이 없다면 오늘의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나’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메멘토’는 기억하지 못하는 자가 기억하기 위해 싸워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아내를 살해한 범인을 찾기 위해 단서를 찾아야 하는 그는 자신의 기억을 데이터베이스화한다. 휘발성 D램과 같은 그의 기억을 유지하기 위해 항상 메모와 사진을 남긴다. 그것도 모자라 문신까지 함으로써 그의 기억을 연장하고자 한다. 하지만 누군가 메모나 사진을 조작함으로써 그의 기억은 쉽게 변조되고 만다. 데이터의 조작 앞에 기록은 무력하다. 결국 그는 기억의 한계에 봉착한다. ‘첫 키스만 50번째’에 등장하는 루시(드류 베리모어) 또한 기억하기 위해 매일 일기를 쓴다. 그녀가 기억하고 싶은 것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기억이다.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 기록하고 그 기록 속에서 겨우 삶의 희망이라는 것을 건져낸다. 하지만 그녀 또한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의 고통에서 쉬 헤어 나오지 못한다. 매일 아침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에 대해 깨닫는 고통을, 사랑하는 사람조차도 기억하지 못하는 자신의 한계를 끝내 받아들이지 못한다. 물론 마지막에 사랑으로 치유되긴 하지만 그녀의 미래가 여전히 희망적이지 않다.
반면, ‘박사가 사랑한 수식’에서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은 고통이기보다는 행복처럼 비춰진다. 물론 그 또한 자신이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을 때 슬픔을 느낀다. 하지만 그것은 기억하지 못하는 자신의 한계에 대한 슬픔이라기보다는 허무하게 지나가버린 세월에 대한 회한이다. 자신이 좋아했던 야구 선수가 벌써 은퇴한 사실을 깨달았을 때,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이 너무 많이 변해보린 모습을 보았을 때야 비로소 슬픔을 느낀다. 그래서인지 박사는 기록에 그다지 집착하지 않는다. 자신이 80분밖에 기억을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 가정부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에게 아들이 있다는 것 정도만 옷깃에 기록한다. 자신이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정보이기 때문에 그것만 있으면 그만인 것이다.
오히려 ‘박사...’에서는 기억하는 자의 슬픔이 더 크다. 세상이 얼마나 박하며 인생살이가 얼마나 험난한가를 논할 때 기억은 슬픔의 유일한 근거가 된다. 실연당했을 때, 오랫동안 품어왔던 꿈을 이루지 못했을 때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 고통스러워할 때 우리는 흔히 기억을 지우려고 한다. 인간의 자기보호본능이라는 것은 끔찍한 고통 앞에서 ‘블랙아웃’이라는 유효한 정신병적 기능을 발현해내지 않는가. 박사와 함께 살아가는 형수는 한 때 그와 내연관계였던 인물이다. (사실 영화의 설정대로 죽은 형의 부인과 시동생이 함께 살아가는 모습은 왠지 어색하다. 형의 유산으로 맨션을 짓고 그 임대료로 살아가는 형수이기에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시동생을 거두는 것으로 생각하면 그만일는지 모르나 현실적으로 보자면 유산 나눠 갖고 따로 사는 것이 좀 더 자연스럽다.) 영화는 그와 형수가 내연의 관계였음을 넌지시 드러내며 새 가정부로 인해 행복한 생활을 해나가는 박사와 이를 보며 형수가 느끼는 감정의 변화를 중첩시킨다.
처음 가정부를 들일 때 형수는 서로 내왕하지 말 것을 주문한다. 시동생과의 관계에서 말썽이 생겨도 알아서 하라는 것이다. 몇 년간 아홉 번이나 가정부를 바꾼 전력도 있거니와 그녀 자신이 시동생과의 관계를 잘 풀어나갈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새 가정부와 그의 아들이(박사는 이 아이의 이름을 루트 π라고 부른다.) 시동생과 행복하게 지내는 것을 지켜보며 점점 질투심을 느끼게 된다. 결국 밤새워 시동생을 간호한 가정부를, 함께 밤을 지냈다는 이유로 해고하고 만다. 이런 형수의 감정적 변화에는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아쉬움과 그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위해 가족과 친구들마저도 저버렸던 것에 대한 죄책감 그리고 그런 상실감의 반대급부로 나타나는 집착이(그녀는 시동생이 영원히 기억할 사람은 오직 자신밖에 없다고 말한다.) 혼재되어 나타난다. 거기에 용기가 없어 지워버린 아기에 대한 미안함, 동생의 기억을 잃게 한 사고의 원인이 자신이라는 자책 그리고 10여 년간 동생을 보살피며 함께 살아 온 수많은 날들에 대한 기억이 있다.
그녀는 기억하기 때문에 고통스럽다. 기억하기 때문에 그 기억을 쉽게 내던지지 못한다. ‘첫 키스만 50번째’에서 루시는 쉽게 사랑을 버릴 수 있었다.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고통의 근거는 사라진다. 고통이 없는 선택은 언제나 쉽다. 그런 점에서 고통과 집착은 오로지 기억하는 자의 몫이다. 지나간 일들을 되씹고 후회하고 다시 희망하는 힘겨운 과정은 기억을 잊는 과정이 아니라 기억이 주는 그저 고통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물은 흐른다’는 것에 대한 수식
사람의 인생은 시간의 물길과 같다. 하지만 삶이라고 이름 붙여질 수 있는 그 길을 흐르는 것은 바로 기억이다. 기억은 흐르다가 바닥의 요철을 만난다. 바위라도 만나면 물길이 크게 바뀐다. 직선으로 흐르던 것이 점점 삐뚤삐뚤해진다. 기억의 물살은 너무 세차서 의지만으로는 물길을 되돌리기 힘들다. 여기에는 이런 수식이 적용된다. F(힘)=ma(질량×가속도). 기억이 물길을 만드는 힘은(F) 그 기억의 무게와(m) 시간의 빠르기(a)에 비례한다는 것. 기억이 물길을 만드는 힘이란 다시 말하면 기억이라는 것이 우리의 삶을 이끌어가는 힘이며 반대로 말하면 기억에 대해 우리가 느끼는 저항력이다. 우리는 우리의 일생이 하나의 목표를 향해 항상 직선을 그리기만을 바라지만 누구도 그런 행복(?)을 얻지 못한다. 삶의 불평등한 조건들, 많은 사건들과 일관성 없는 선택들로 인해 항상 바라던 길과는 전혀 다른 곳에 가 있게 된다. 직선이란 불완전한 인간에게는 관념일 뿐이며 이상일 뿐이다.
하지만 박사는 완벽한 직선을 만들어가고 있는 사람일는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기억손실증은 축복일 수 있다. 80분의 기억. 겨우 도화지 하나에 그려낼 정도의 짧은 직선이지만 그걸 그리고 지우고 또 다시 그리고 지움으로써 영원히 끝이 없는 직선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레테(망각)의 강을 넘나들며 진실을, 이데아를 반복 체험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것은 단지 유한직선의 끊임없는 반복이 아니다. 박사는 ‘물질에도, 자연현상에도, 감정에도 휘둘리지 않는 영원한 진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라고 말한다. 박사의 직선은 그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가장 완벽한 직선이다. 마지막에 박사는 자신의 옷깃에 달려있던 최소한의 정보마저도 떼어버린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그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자연에, 자연에 내맡기고 한순간, 한순간을 살아나가려고 해.” 그러고는 형수에게 수식을 하나 적어 보여준다.
e^pii+ 1 = 0
이는 18세기 수학자 레온하르드 오일러가 만든 공식이다. 무한한 숫자인 ℮(네피어수)에 또 다른 무리수인 π(파이)와 허수 i. 이들이 결합한 수에 1을 더하면 0이 된다는 것. 영화 속에서 이 공식의 완결성은
e^pii = -1
에 있지 않다. 그 이유는 아래 수식이 상실, 고통, 세상과 우주의 혼돈을 의미하는 -1에 방점을 둔다면 위 수식은 무(無), 자연, 영원과 질서에 그 방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박사가 사랑한 수식이다. 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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