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빠진 사람에게는 별들과 산들바람뿐 아니라 수학적 분할까지 뭔가 애달프고도 시적인 감정을 느끼게 한다.
-마르쉘 프루스트
청춘이 아름다운 건 어쩌면 그 시절이 미완성의 계절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제 색깔을 찾지 못한 빈 캔버스 같기도 하고 제 모양을 찾지 못한 찰흙덩어리 같기도 한 시절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채워 넣고 채워 넣어도 그것이 포만감이 되지 못하는 것은 그 시절은 무언가를 채울 수 없을 만큼 공허한 시절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것을 우리는 젊은 시절, 즉 청춘이라고 부른다.
사실 청춘의 아이콘은 사랑이다. 사랑이 없는 청춘은 한여름에 마른 나목처럼 어울리지 않다. 한 살 한살 나이를 먹으며 세상에 노출되어 인생이라는 공해에 물들어 가다보면 사랑이라는 감정도 현실이라는 세속적 가치로 귀속되어버리는 것을 목격하곤 한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사랑을 사랑답게 꿈꿀 수 있는 나이 역시 청춘이 아닐까. 순수한 설렘, 그 섬세한 떨림의 결정 같은 마음을 아름답게 유지하고 지켜낼 수 있는 시절은 분명 청춘이라는 시절에 주어진 자격이다.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의 "to make a prairie(초원을 만들고 싶다면)" 중 "To make a prairie it takes a clover and one bee.(초원을 만들기 위해서는 꿀과 클로버가 필요하다.)"-영화의 자막을 그대로 옮김-를 인용하며 시작하는 영화는 이 영화의 원작과는 무관하게 "허니와 클로버"라는 제목의 어원을 설정한다. 이 영화가 만들고자 하는 초원은 사랑일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 초원을 위한 꿀과 클로버는 과연 무엇일까.
영화는 원작만화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캐릭터를 통해 드러나는 관계의 알고리즘으로 이야기가 지니는 클리셰를 극복한다. 사실 젊은 남녀의 모임 안에서 사랑이라는 답습이 행해지지 않는다는 것은 이상할 정도로 당연한 사실이다. 그것도 캠퍼스라는 지정학적 위치에서 말이다. 다만 사랑이라는 감정의 일관성과는 달리 다각적인 방향성을 띤 그 결과적 방식과 소통은 별개의 문제다. 이 작품, 즉 원작을 비롯한 이 영화가 보여주는 사랑이야기는 단순히 그 사랑의 맺음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미화에 그치지 않는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그 시작과는 무관하게 발을 딛게 되는 다양한 표정의 산물들을 개개인의 인물에 대입함으로써 그 젊은 날의 사랑들이 단순히 아름다웠다고만 말할 수 없는 개별적인 회자담으로 상정되어 가는 과정을 세세하게 따라잡는다.
사실 사랑이라는 게 그렇다. 책임지지도 못할 감정이 불쑥 자라나 그것은 그 감정 고유의 순수한 의도와 다르게 비극으로 점철되거나 슬픔으로 귀결되는 것이 비일비재하다. 사실 사랑이라는 것은 일방향이 아닌 쌍방향으로 소통되어야만 완성되는 감정이기에 본인의 절실함만으로는 완벽할 수가 없는 과제가 되기도 한다. 상대방의 마음을 얻어내기까지의 일련의 시련을 견뎌야 하며 그 시련이 끝이 보답으로 마무리되는 것만도 아니다. 그리고 그 시련이 길어질수록 미련이라는 간절함이 더해지기도 한다. 때로는 그 방향성이 서로 일치하지만 확인되지 못함이라는 명제 하에서 마지막 다리를 건너지 못하고 돌아서는 경우도 있다. 사랑이라는 것은 실로 미묘하면서도 그 속마음을 알기가 도무지 쉽지가 않은 것이다.
영화 속에서는 이런 감정의 복잡한 알고리즘을 통해 젊은 날의 사랑이 단순히 아름다웠다라고 말하기 보다는 그 시절에 찾아오는 통증같은 간절함이 그 시절을 아프고 서글프게 만들어감으로써 젊은 날의 청춘이 단순히 그 시절에 머물러 있음으로만 아름답다라는 환상에서 구출한다. 그 시절이 아름다운 건 그 아픔이 있었고 그 아픔조차도 참아내고 싶었던 간절함이 있었기에 가당하다는 것을 말한다. 마치 캔버스에 채워지는 다양한 빛깔의 색이 하나의 작품이 되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채색과 덧칠의 반복적 행위처럼 혹은 하나의 나무토막이 하나의 조각이 되기 위해서는 톱에 의해 깎이고 망치와 정에 쪼여야 하는 것처럼. 그 시절이 무르익기 위해서는 좀 더 아프고 눈물 흘려야만 한다는 것을 단순하면서도 다양한 표정으로 묘사한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이 기존의 청춘을 다룬 순정만화들과는 사뭇 다른 것은 캐릭터들이 아오이적인 특성과는 차별되는 성향에서도 기인하지만 좀 더 현실감있고 세세한 감정의 교류에 대한 묘사가 능숙하면서도 세련되었다는 것이다. 원작 만화가 지니는 사랑의 빛깔은 무채색에 가깝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간혹 지니곤 하는 반짝거리는 재질의 신기루성 아름다움을 묘사하기 보다는 사랑이라는 단어 안에서 묵인되는 엇갈림과 마주치지 못함의 그림자같은 재질의 일상적 자연광을 묘사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비단 말할 수 없음이든 말하지 못함이든 혹은 말했음에도 통하지 않음이든 간에 이루어지지 않거나 이루어지기 힘든 사랑의 간절함과 애달픔 앞에서 갈망하고 때론 좌절하는 젊음이 그것을 해내거나 한발 더 나아가 이루어내는 다양한 방식의 극복담을 통해 보여 지는 것은 젊음이라는 혈기가 지니는 무한한 에너지의 싱그러움이다.
자신의 조각을 불태워버리는 모리타(이세야 유스케 역)의 무모함이나 먼 길을 자전거로 돌고 나서야 자신이 고민했던 것을 결심하는 타케모토(사큐라이 쇼 역)의 자학적 각성조차도 그 시절 안에서는 도전이 된다. 언제든 넘어져도 일어설 수 있는 시기. 그것은 청춘이기에 가능한 공식이 대입되지 않는 셈과 같다. 사실 쥐고 있는 것이 없기에 청춘은 초라할지라도 버릴 것이 없기에 청춘은 자유롭다. 그 자유로운 시절에 스스로를 위해 노력하고 그 순간을 즐기는 것은 분명 먼 미래의 뻣뻣한 삶을 잠시나마 풀어줄 여유같은 추억담을 쌓아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무엇인가를 유지하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것이 아닌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달려드는 무모함이 그 시절의 낭만이자 그 시절을 벗어나 누릴 수 없는 청춘의 권리일 것이다. 그리고 때론 얻을 수 없고 이룰 수 없는 일일지라도 그 절실함을 저버리지 않고 지녀야하기도 한다. 비단 그것이 이루어지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감정에 헌신적으로 다가서는 진실함을 유지할 수 있는 것도 어쩌면 청춘이라는 투명한 시절 안에서 발견되어야 할 아름다움일 것이다. 자신의 사랑이 결실을 맺기에는 불투명할 것을 알면서도 고개를 돌리지 않는 마야마(카세 료 역)나 아유미(세키 메구미 역)의 감정이 고집이 아니라 포기할 수 없는 절실함인 것도 그들이 머물러 있는 그 시절의 혜택이다.
망설임과 방황은 청춘의 특징이자 특권이다. 그만큼 창피한 기억도 많고 실패도 많다. 부끄러움 없는 청춘, 실패 없는 청춘은 청춘이라 이름할 수 없다
-다치바나 다카시 作 "청춘 표류"中
누구나 청춘을 보내고 언젠가 그 시절을 그리워한다. 아무것도 지니지 못한 그 시절이 그리운 것은 아무것도 지니지 않았기에 그 어떤 무언가가 되어도 상관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무모하지만 자유로운 시절. 사랑이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인생의 계절. 그것은 벚꽃이 아름답지만 그것이 지고 나서야 안심이 된다는 영화의 대사처럼 청춘이라는 무지몽매함이 불안하기에 그 순간의 아름다움이 지속되기 보다는 낙화의 서글픔처럼 아픔을 겪어내는 과정의 처절함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시련이 결코 청춘이라는 가지를 꺾어버리지 못할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을 지닐 수 있기에 말이다. 마치 순례자처럼 먼 길을 돌아온 타케모토가 그 길 끝에서 하구미(아오이 유우 역)의 아름다운 미소를 대면할 수 있었던 것처럼. 아, 어쩌면 그것은 타케모토보다도 필자를 위한 축복이었는지도 모르겠다.
-written by kharisma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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